옛날 옛적 지리산에서 나무하던 시절

by 김용규 posted Jun 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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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엔 나무가 아주 요긴하게 생활 필수품으로 존재했다. 아궁에에 군불용으로나 밥을 지을 때 연료로 요긴하게 사용되어진 것이 땔 나무였다. 나무의 종류로는 고급품인 장작이 있었으나 남의 산에 가서 함부로 소나무를 베어 낼 수 없었던 지라, 산이 있는 집에서는 벌채 허가를 받은 곳에서만 소나무를 베어 내서 장작을 만들 수 있었고 대부분은 억새나 싸리, 가시 나무를 함께 베어서 채취한 나무를 주로 이용하였다. 때로는 소나무 가지를 친 것을 말려서 이용하기도 했었다.

당시엔 도시에서조차 아주 고급품으로 통했던 연탄이 있었는데 시골에서는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었다.

60년대 말에 곤로라는 것이 가끔 눈에 띄었다. 곤로의 등장으로 부엌이 상당히 세련되기 시작했다. 곤로에 불을 붙여서 국 냄비나 작은 밥짓기에 이용되었으니 참 편리한 도구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석유(등유)의 수요도 가히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래도 시골에서는 부엌을 장식하는 것은 땔감용 나무가 거의 전부여서 겨우내내 사람들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이기도 했다.

겨울 방학 때면 나 역시 나뭇꾼으로 전락을 했다. 하루에 두 짐씩 꼭 나무를 해야만 했다. 군불용으로, 또 소죽을 끓이기 위해 우리 집에서 필요로 하는 나무의 양은 참 많기도 했다.
아침 나절에 한 짐, 오후에 또 한짐, 매일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무를 해야만 했고, 처음엔 60~70kg쯤 되는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내려 올 때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예사였다.

산길 오솔길이 고울 리 만무하다. 높은 곳, 패여진 곳, 바위 틈새 지나기, 낭떠러지 길등을 거쳐 짐을 져다 날라야 했기 때문에 참 많이도 힘이 들었다.

집집마다 산에 올라서 땔감용 나무를 해 날랐기 때문에 산 등성이에 나만을 위해 억새풀이나 다른 잡 풀들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한달 쯤 지나면 자꾸 먼 산으로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나무를 하기 쉬운 곳에는 어느 누군가가 금세 채취 해 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엔 작은 칫골로 두 어짐을 해 나르면 그 곳에선 더 이상의 나무를 할 곳이 없어졌다. 다음으로 공격을 하는 곳이 얼음배기였다. 다음은 작은 칫골 대배기, 다음은 방곡 뒷산, 심지어는 뒷골 가까이까지 가서 나무를 해 날라야 했다.

이런 일과들이 초, 중, 고때는 물론이고 대학 때와 일선에 나와서까지 연속이 되었다.

이런 일이 정지 된 것은 난방용 보일러의 등장에서부터였다. 처음엔 연탄 보일러가 등장하더니 나중엔 석유 보일러가 시골의 각 가정에 급속도로 보급이 되면서부터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갈 일이 없어졌다. 장작이 수북히 생산되어져도 필요가 없어졌다.

겨울이 되면 고향 시골집의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 아름다운 정취가 물씬 풍긴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구경하기조차 어렵게 되어졌다.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던 기억들이 지금은 아주 원시적 시절의 이야기 같은 것은 왜일까?

급속한 우리 주변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으로서 무엇인가를 자꾸 기록화 하여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날 때가 많다.

그런 기억들도 한때는 엄천골의 삶의 모습이요, 살아 가는 풍속도였으니 세월과 함께 아득한 옛날 옛적의 일로만 치부하기엔 조금 아까운 기억들이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무를 했던 기억들과 시골 생활에서의 끝없이 요구 되어진 고된 노동의 환경들이 가끔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것은 나 만의 추억은 아닐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