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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에 가본 풀이섬(草島)

욕지도 사람들은 초도를 풀이섬이라 불렀다.
내가 하숙하고 있는 집 안주인은 풀이섬에서 시집온 사람인데,나이 서른 중반으로 꽤 예쁜 편이다.
풀이섬은 인가가 셋이고 경치가 좋다고 날더러 꼭 한번 가보자는 바람에 어느날 따라갔다.뗀마를 저어 가니 파도가 어찌나 거센지,그래도 서울서 미식축구 선수깨나 해봤다는 내가 얌전한 색씨마냥 꽉 뱃전만 붙들고 있었다.서울 남자는 건장해도 소용없다.섬여인은 체구가 작아도 그 연약한 손목으로 능숙하게 노를 젓는다.
남쪽으로 한시간 가니 동백나무 많은 섬이 나타난다.투명한 물밑은 자갈과 헤엄치는 고기들이 훤히 보인다.배가 잔잔한 물결을 헤쳐가니,바람은 부드럽고,공기는 싱그럽다.선착장 부근은 둥그런 만(灣)이 형성되었는데, 아름들이 동백나무가 무성하다.
배에서 내리자,물끼 머금은 자갈은 보석인양 쫘악 짜르르 물결에 씻겨 영롱하고,번질거리는 아름들이 동백잎 아래 떨어진 붉은 동백꽃은 짙붉은 카펫을 깐 것 같다.고갱이 타이티에서 본 풍경이 이처럼 환상적 원색일 것이다.화가가 거친 텃치로 붉은 물감을 잔뜩 칠해놓은 것 같다.

'그리운 카프리에 섬나라에,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수정처럼 맑은 바닷가에 처녀들 미소가 풍기네.'

Christal water(수정같은 맑은 물)란 표현이 문학적 수식어가 아니란걸 이곳에서 비로서 알았다.빈 배 하나가 파도 위에 한가히 흔들리고 있고,동백나무 숲 아래로 담 없는 집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장독대에 앵두가 붉게 익어가는 집에서 느긋이 오수를 즐기던 소가 기척에 고개를 들자 딸랑! 소 목에 달린 방울소리가 정적을 깬다. 넓은 잎 싱싱한 호박줄기만 소리없이 초가 위로 뻗어가고 있다.
'있나?'
언니가 동생을 불렀다.
'언니야!'
고요하던 집 황토벽에 달린 방문이 열리고,거기서 반가움 가득 담긴 한 처녀 얼굴이 보였다.미리 올 것을 알고 있던 듯 싶다.급히 뜰로 내려서는 처녀를 보자,퍼뜩 언니가 자꾸 나보고 풀이섬 가자고 한 궁금증이 풀린다.처녀는 언니보다 더 미인이다.까무잡잡한 피부에 오뚝한 콧날과 진한 눈섶,늘씬한 몸매.늘어진 머리칼 등 전형적 남국 미녀였다.'고독'이란 영화 속의 엘리자벹태일러가 저랬다.가늘고 짙은 눈섶과 늘씬한 몸매는 리즈보다 더 미인이다.'듀마휴이스'의 소설 여주인공 '춘희'가 저랬다.머리에 동백꽃 꽂은 여주인공이 동백나무 춘(椿),계집 희(姬),춘희 아닌가.

태양이 쓰다듬어주는 향기로운 나라에서,나 알았었나니,남모를 매력 지닌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을.
사람들 눈에 게으럼 뿌리는 종려나무와 나무들 뒤얽힌 아래서,그 얼굴 핼쓱하고도 따뜻한 이 밤색의 미녀는,목을 점잖게 도사린채 걸으면 사냥의 여신마냥 드레지고 날씬해.그 미소는 고요하고,그 두 눈은 으젖.
마담,그대 만일 영광의 쎄느강이나,푸른 르와르강가로 가신다면,고풍의 성을 아름다이 함직도 한 미녀.
그대 그늘 짙은 숨은 집에 포근히 쌓여,크나큰 눈에 검둥이보다도 순해질 시인들 가슴 속에 숱한 쏘넽 싹트게하리.

처녀는 보들레르의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에게'란 시를 생각나게 한다.
낮선 나를 보자,살짝 피해 서는 수줍은 모습은 영판 사슴이다.저렇게 늘씬한 몸매로 산에서 나무하고,바다에서 뗀마 젓고,자맥질하고 조개 잡으며 산 것일까?
'아부지는?'
'밀감나무 심으러 산에.'
대화 중에 나를 의식한 처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수줍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계산된 교태와 수줍음의 차이는 인공과 자연의 차이만큼 크다.동백꽃같이 수줍은 그녀에게 동백새처럼 날개 퍼덕이며 힘차게 날아가고 싶었다.
'나 아부지 보고 오께.'
언니는 이 말 한마듸 남기고 산으로 가버렸다.흘레 시킬 암말 옆에 종마 데려다놓듯 빈집에 나와 처녀만 남겨두고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되어 굴뚝연기가 마당에 낮게 깔리더니 처녀가 부얶에 들어가 불을 부친 모양이다.얼마 후 처녀가 그 위에 돌나물과 한 종지의 게장,삶은 고구마 담긴 소쿠리만 달랑 놓인 상을 내 옆에 놓더니 저만치 훌쩍 물러선다.
'같이 식사 합시더.'
한마듸 던져도 기척없고,숲매미 소리만 빈 뜰을 지나간다.
'보이소 예.'
처녀 찾아 뒷뜰로 가보니,밭둑의 봉선화 옆에 서있던 처녀가 봉선화보다 더 붉어져서 얼른 피한다.혼자 고구마를 몇 개 먹고,겉에 날개 달린 사자가 그려진 비사표(飛獅標) 통성냥에서 성냥을 꺼내 담배 한 대를 부치니,처녀가 하얀 대접에 물 한그릇을 떠와 대청 끝에 놓고 저만치 앉는다.
'저 꽃 이름은 뭐라꼬 합니까?'
물으면 처녀는 얼굴만 빨개서 돌아선다.
그 꽃이름은 유도화다.잎은 버들같고 꽃은 복숭아꽃 같다고 유도화(柳桃花)다.유도화 연분홍 꽃잎이 인적 없는 햇볕 아래 너무 곱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뜰만 쳐다보고 있던 처녀가 문득 생각난 듯 삶은 볏짚을 바가지에 떠 소에게 갖다준다.코뚜레 위로 혀를 날름 내밀어 소가 처녀의 손을 햟는다.
'소가 몇 살 짜리요?'
'..... ....'
처녀는 다시 빨갛게 얼굴 붉힌다.

박목월의 시를 속으로 외워보았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한다.밭이나 갈고 살아라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흙담 안팍에 호박 심고,들찔레처럼 살아라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슴,구름처럼 살아라한다.바람처럼 살아라한다.

지붕을 덮은 마당 감나무는 과육 시퍼런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인적 드문 이곳에서 처녀와 찔레꽃처럼 향기롭게 살까?

해거름에사 내려온 노인은 무척 친절하다.
'면에서 밀감나무 무상으로 심으라캐서.'
노인은 나에게 설명하고,
'아부지 제주도는 밀감 키우모,자식 대학공부 시킨다 않캅디꺼?작년에 심은거 잘 컸던만요.3년만 있으모 우리도 수확하제요?'
누구 들으라는 것인지 언니는 말을 맞춘다.

황혼에 바다로 나오니 섬 꼭대기에 걸린 구름은 주황빛이고,금빛 바다가 어둠을 머금자,어느새 멀리 처녀네 등불이 별처럼 빤짝인다.토방의 아주까리 등잔일 것이다.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조수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았다.달은 과일보다 향기롭다.
동해 바다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곱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아래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의 시같은 달빛이 노 저을 때마다 하얀 은파를 일으킨다.
저 섬은 멀지않아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는 과수원이 될 것이다.아름들이 동백들은 해마다 붉은 카펫을 깐듯 해변에 떨어지고,물 속의 풍부한 어족은 누구 것이랴.마음 먹으면 풀이섬을 나의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솔로몬의 영화보다 황야의 한송이 백합이 더 귀하다 하지 않던가.그와 낙원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다.처녀는 외모도 아름답지만 그 마음은 도시의 오염된 아무 것도 그려지지않은 Tabula rasa(白紙) 아닌가.그런 순결한 처녀와 꽃과 약초를 가꾸며,사색하며 사는 인생도 한번 시도해볼 철학적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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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 2003.12.03 13:20
    흘러간 세월을 아름답게 하는 감동적인 추억이군요.
    더구나, 거사님의 기품이 서린 글은 天衣無縫입니다.
    얼마전에 올리셨던 '섬에서 살고싶었다'는 글과의 연관성을
    넌즈시 유추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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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바다 2003.12.03 13:57
    초록 수면 위에 옅게 드리운 안개 마냥 다가서면 사라질 것 같은 순결미가 그 처녀에게서 느껴집니다... 예.. 정말 시도해 볼 만한 철학적 인생이셨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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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해 2003.12.03 18:27
    동백처럼 선연한 젊은시절 추억이네요. 우물가에 걸린, 햇살담은 이파리들이 흔들리는 시간처럼 감미롭게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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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거사 2003.12.03 19:31
    처음 뵙는 하해님,반갑습니다.'추억의 방'이란 것만 보고,그리 갔다가 교통정리 되어 이리 왔군요.제가 원래 컴퓨터엔 좀 엉성합니다.미안합니다.
    솔메거사님 허허바다님 놀랍습니다.나는 그동안 앞마당(사랑방 산행기 지리마당 섬진나루)만 보다가 '추억의 방'에 처음 왔는데,두분은 다 보고 계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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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2003.12.03 21:32
    철학적 인생의 시도, 꽃과 약초를 가꾸며 사색하는 인생.. 그 다음 35년이 지나셨습니다. 그 다음이 너무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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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3.12.04 09:36
    젊은날의 아련한추억 잘읽었 습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 오래간직하고 싶습니다.
    김현 거사님 항상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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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거사 2003.12.04 14:48
    희망님 오해봉님 세월 저편 이야기 비슷한 걸 지리산 싸이트에서 간혹 봅니다.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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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유화 2003.12.06 10:16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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