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시 별과의 대화

by 섬호정 posted Oct 25, 2004 Views 1689 Replies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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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에 오르기 위해 길 떠난 첫 날,  03시에  금대암 마당에  섰다. 
깊은 어둠 속의 별들이 너무 뚜렷 해 가까이 비밀스런 말을 걸어 올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뜰 아래 대숲이 사그락 사그락 바람을 일어대는 소리에 무서움이 생겨
 별들과의 대화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하늘의 정경이 마치 '검정 벨벳 정장에 매달은 노란 별 훈장'으로 보였던 밤.

그 귀족 같은 별무리들의  아는 이름을  찾느라 목 고개가 아파왔다 
우리, 벽소령에서 만나자~ 반짝이는 별과  헤어져 안으로 들어와 따순 방에 
누워서  감은 눈 속으로 우아한 그 귀족별 하나 따라와 열 여섯에 짝사랑 하던 
그 아이를 떠올린다.

벽소령 달빛이 사라진 깊은 밤, 여전히 03 시에 세석 쪽 길 검정나무 울타리에 
기대섰다. 이 길은 언젠가 오브넷 사진에서 본 누군가 한 사람이 여름 산행중에 
벽소령을 향해  걸어오던 그 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벽소령에 오던 오래 전 그때는 검정 나무 울타리는 설치되어 있지
않아  황량한 산 길이었다. 이로 인해 벽소령 산장은 더 정겨운 운치를 주고 있다.
숙소 앞 마당에는 검정색 山 유니폼을 차려입고 길 떠날 채비에 많은 사람들이 
두런대고 있어 그들과 조금 떨어져서 울타리에 기대어 섰다.

벽소령 산장의 뾰족한 지붕에 가리워진 하늘을  세석 쪽으로  조금 벗어나니 
별들이 더 총총히 잘 보인다. 
벽소령의 별들은 하늘에서 산장의 세련된 지붕위로 떨어져 미끄러질 듯하다,
어젯밤 금대암의 03시 별들보다 어쩐지 귀족스럽기는 덜하다.

길떠나는 산꾼들의 수런대는 분위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별들은 저마다 야간 산행을 떠나는 이들을 전송하는 말들을 보내오고 있다.
-뜨거운 라면 국물 좀  더 많이 먹고 떠나거래이~
-앗다, 이제 그만 묵소잉~ 날새기 전에 싸게 가야제~
쏟아질듯 무언의 빛으로 말을 보낸다.
 
껌껌한  산 중 밤 하늘도 한 무리 산꾼들의 이마에 쓴 머리전등 불 빛들로 
온전한 별빛 감상이 덜 된다.
누군가 우체통 앞, 벽소령 주릉선의 이정표 약도판 앞에서 찍사를 부탁한다.
자신 없지만, 어두워 내 모습이 잘 안보이니 찍을 만 하다 싶었는지...부탁이다.
그 사진 잘 안나오면 다시 벽소령 찾아 올테지... 

마치 검은 장막을 둘러친 어두운 무대에서 거의 무언극을 하는 분위기 같다. 
찬 바람이 싸늘하여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매끄러운 피부를 느낀다.
별들에게 눈짓으로 따라오라 마음 속으로 말하고 식수장을 향해 내려간다.
어두운 숲 속 길을 한 발짝 씩 조심해 내려가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

몇 걸음 층층대를 내려가다 멈추고 따라오는 별을 확인하며 다시 말한다.
'법성원융 무이상 제법부동 본래적.무명무상 절일체 능지소지 비여경, .....
아, 저절로 스며 나오는 소리, 의상대사가 쓴 법성게를 읊고 있다.

마치 산 속의 절에서 새벽 도량석을 하듯이...벽소령 03시 지리산 마당 한 켠을
도량석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지리의 아픈 역사 속 그들의  명복을 빈다...
마음이 훈훈해 오고 있다. 

머리 위엔  크고 작은 별들이 샘터 까지 따라오며  내 도량석 소리를 귀담아 
듣고 반짝거린다, 발걸음은 어느새  큰 물병을 찾아 들고 산 아래 숲 속으로 
어둠을 뚫고 내려간다. 약간의 두려움에 가슴 두근거리던 것도 없어지고,
별들과 법성게를 읊으며 새벽 물길을 열었다.

먼지 끼었던 산 아래에서의 마음이 높은 산 상에서 별님과 대화를 나누어 더 
친해진 기분이다. 언제, 또 다시 해 볼 수도 없는 03시 별들과의 대화는 
벽소령에서 만들어지는 추억 어느 한 페이지를 새롭게 메꾼다. 
내 생애에 남는 신성한 영혼의 대화이다.

아마도 지리 유사 이래 벽소령에서 03 시  법성게 도량석은 처음이 아닐까?? 
합장한다. 2004. 10. 23. -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