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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주변산행기

조회 수 1539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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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르르릉....
알람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두 개의 시계 침이 만들어 놓은 것은 야구장 모양.
새벽 2시50분이었다.

그 시간은, 일이라면 일어나지 못할 시간이었다.
일은 놀이 삼아하고 노는 것은 죽기 살기로 하는
한심한 일상의 굴레를 생각하면 때로 실없는 웃음만 나온다.

아직 짧지만, 산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에
꼭 걷고 싶었던 산길이 몇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하나가 덕유산의 남북 마루를 이어 걷는 것.
소박한 그 꿈을 이룰 날이 마침내 다가 왔음이다.
다소간에 아쉬운 건, 철쭉은 떨어진지 이미 오래고
눈이 내리기에는 아직 여러 날이 필요하다는 것 뿐.

지리산 자락에 열 개도 넘는 골프장이 만들어진단다.
이 땅의 산자락이 골프장 건설과 전쟁중인 이즈음에
뫼 높고 골 깊은 덕유산 자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봇대를 감싸 안은 골프장 결사 반대 포스터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영각사 바로 아래에서 왼쪽으로 가야 하는 산길.
많은 잠을 잘 수 없었음으로 처음부터 널널히 올랐다.
적당한 기온에 구름 마저 숨어버린 청명한 가을 날은  
소나기 무성하던 전날에 비하면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남덕유산 매표소에서부터 삼쩜사 킬로미터.
바위 곁 뫼꽃들을 바라보며 올랐기 때문일까.
질긴 동아줄과도 같은 남덕유산의 철 계단을
저자에 소문난 악명에 비해 다소 쉽게 올랐다.


(남덕유산에서)

남덕유산(1507m) 에 오르니
비로소 하늘 금이 열리며 산하가 발 아래에 놓였다.
건너 쪽 서봉 기슭에 불그레한 빛이 감도는걸 보면
덕유산에도 어느 덧 가을 단풍이 찾아 들고 있었다.

마치 하산하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을 만큼
산길을 내려가다가 또 내린 만큼을 올랐다.
지리의 주능을 축소해 놓은 듯한 기분 좋은 산길은
걷는 동안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삿갓봉을 넘어 삿갓재 대피소에 왔다.
그저 한가롭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한가한 곳.
대간을 걷는 산객들이 간간이 쉬어간다는 대피소엔
두어 명의 젊은이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스무명쯤의 남녀가 어울린 한 무리의 사람들.
대간을 걷는다는 그들은 하늘로 가고 있었다.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이 땅의 거대한 산줄기를
나는 언제쯤 다 걸을 수 있을까.


(밑에서 올려다보니 그들은 마치 하늘로 가는 사람들 처럼 보였었다)

동엽령이다.
영각사에서부터 걸어온 산길이 14km이니
오늘 걸어야 길에서 반쯤은 걸었나 보다.

옛적에 봇짐꾼들이 넘나들었다던 고갯길 동엽령.
옛 사람들이라고 해서 까닭도 없이 쉬어 갔을까.
병곡과 용추를 이어주는 이 조그마한 고개 길엔
가을 해바라기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더라.

재를 넘으며 기나긴 마루금을 걸었더니
덕유산 중봉의 발아래 덕유고원에 왔다.
봄날의 덕유는 철쭉 꽃밭에서 해가 올라
철쭉 꽃밭을 따라 해가 떠난다고 했었지.


(중봉과 덕유고원)

해마다 오뉴월이면 분홍 꽃이슬이 하늘아래 고원을 적시고
두어 달이 지날 즈음엔 노랑 색 원추리가 살랑거리는 여기.
오늘은 산오이풀과 한라부추가 그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향적봉 가는 길 왼쪽에는 늙은 고사목이 하나 있는데
반가이 바라보니 뿌리가 뽑힌 채로 반쯤 누워 있었다.  
홀로 있음으로 처연히 외로울 한 그루 저 고사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던 영원의 제 생명을 끝내 다하고 말았다.

덕유산 마루의 마지막인 향적봉(1614m).
향적봉에 이르니 더 오를 곳도 없었다.
아니, 오를 곳이 있더라도 더 오를 필요가 없었다.
햇볕마저 달콤한 가을날에 마음은 이미 충만하였으므로.

천왕봉에서 반야봉을 지나 노고단까지
거의 일자로 늘어선 지리산의 마루들.
걷다가 뒤를 보면 지리산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단지 아주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지.
님에게 한발 짝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선  
내 걸어 왔던 길을 반대로 걸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지리산 주능선. 상봉에서 반야봉까지)

보라
무궁한 우리의 산하와
아름다운 능파 능파여
한 세월이 지나더라도
지금 만큼만 살아 있으라

대피소 옆에 세워진 방송국 송신탑이
지리산 주능을 두 동강이로 갈라놓았다.
몇 해 전 겨울에 향적봉에 올랐을 적엔
아고산대의 거센 눈보라에 눈이 감겨 미쳐 보지 못했었지.
기왕에 세워 놓아야 할거라면 굳이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행여 저 곳이 아니면 설자리가 없었을까.  


(향적봉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송신탑이 기가 막히군)

우리 산의 이름을 가만히 살피다 보면
산과 산의 이름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선인들의 지혜에 때때로 놀라곤 하는데
덕유 만큼 이 산을 제대로 표현한 이름이 또 있을까.

산의 깊은 맛은 겨울 산에서 느낄 수 있다.
만산이 그렇지만 덕유산이라면 더욱 그렇다.
흰눈이 산을 덮을 때 덕유산 상고대를 다시 보고싶다.
산은 언제나 한번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음으로.

백련사를 지나 구천동 선경으로 접어들었다.
쓰고자 한다면 명불허전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구천동 계곡은 그저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이곳은 물의 나라였고 물이 지나간 자리에는
세상너머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르르쾅쾅...


(구월담)


(월하탄)

향적봉의 옥수가 산 아래로 흘러 내려
구천동 서른 세개의 비경을 만들었다는데
이름도 고운 금포탄 구월담 월하탄을 지나
지루할 법도 한 5.6km 계곡 길을 내려왔다.

오후 5시20분.
발끝이 조금씩 아파 올 무렵,
금쪽 같은 햇살이 산마루를 넘더니
세상은 하나둘 어둠에 묻혀가고 있었다.

남덕유 매표소-남덕유산-향적봉-백련사-삼공리 매표소 (26.3km, 00시간 00분)

2004. 9.19
  • ?
    덕유산갈래 2004.09.21 23:23
    덕유산에서 본 지리산이 너무 아름답군요.
    한발짝 떨어져서 보는 맛도 괜찮겠습니다.
  • ?
    오 해 봉 2004.09.23 12:31
    낮익은 능선과산길 멀리보이는 지리산능선이 참으로 좋네요,
    영각사에서 삼공리까지 대단히 수고 하셨습니다.

    "그 시간은, 일이라면 일어나지 못할 시간이었다.
    일은 놀이 삼아하고 노는 것은 죽기 살기로 하는
    한심한 일상의 굴레를 생각하면 때로 실없는 웃음만 나온다."

    덩달아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모두 반성하고 각성해야할 문제같기도 합니다(^_^).
  • ?
    슬기난 2004.09.26 19:08
    반쯤 쓰러져 누운 늙은 고사목의 외로움을 생각하는 단이님의 따스한 마음씨가 느껴집니다. 천국의 색깔은 아마 파란색일듯 합니다.
    멋진 산행기에 취해 단순에 덕유자락을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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