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참배기

by 김현거사 posted Sep 02, 2004 Views 1642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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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참배기(상편)

북경에서 연변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중국대륙은 산도 강도 호수도 많다.

오호 애재(哀哉)라!
이 넓은 대륙 원주민이 누구였던가?

우리 한민족(九桓族.九韓族)은 상고(上古)에 바이칼 호수 동쪽 흑룡강(黑龍江,天河.天海)으로부터 안 늙고 안 죽게하는 풀과 약들이 많은 한밝산(白頭山,不咸山.太白山,白山.天山등으로 불림)까지 북만주 일대에 살았다.
'환'이란 우리말 환하다 훤하다의 유사음으로,'밝다'는 뜻과 하늘과 태양을 상징하니,우리는 '하늘족''태양족'인 셈이다.
당시 나라이름은 환국(韓國.桓國.天國)이라 불렀고,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나 되는 거대 제국이었다.

연길(延吉)

연길에 내리니,여기 백두산족 후예가 많이 살고 있다.
인구 30만명 태반이 조선족이라 길가 간판도 한글이고,말도 조선말이고,골프장 광고입간판에 박세리 라운딩 사진도 붙어있다.
거리엔 청(靑)노새 구루마에 턱수염 기른 영감이 회초리 들고 한가하게 마차 끄는 모습도 보이고,대우 프린스 자동차도 보인다.거리에 양말도 신지않고 때묻은 신발 신고다니는 가난한 사람 모습은 남미의 '태양족' 잉카 제국 후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집은 낡은 나무판자데기로 담을 한 붉은 단층집도 있고,'문화주택'으로 불리는 아파트도 있다.화장실은 하늘만 덮은 사통팔달로 주변이 사정없이 다 보이는 문 없는 화장실도 있고,한국돈 2천만원에 살 수 있다는 33평 아파트의 수세식도 있다.

가로에 심어놓은 붉고 푸른 당국화(=과꽃)가 형언할 수 없는 감회를 솟게하니,그 꽃이 혹시 일제가 한민족을 북간도로 이주시킬 때,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고향 떠나던 사람들의 짐 속에 함께 넣어온 애닲은 향수(鄕愁)의 꽃이 아닐까?

수십년 세월 끝에 언어도 일부 다르니,우리가 쓰는 톨게이트는 '도로수금소'요, 턴넬은 '차굴'이고, 소쎄이지는 '고기순대', 장갑은 '손싸개', 브라자는 '젖싸개', 전등은 '불알', 형광등은 '긴불알', 가로등은 '선불알', 샨데리아는 '떼불알'이다.  

이도백하(二道白河) 가는 길

연길 동포 곁에서 하루 밤 묵고,익일 새벽에 백두산으로 떠나니,길은 끝없는 구릉지대와 평원을 지나가고,수십리 들판에 콩 옥수수밭은 끝 없는데,아득한 평원 위에 흰구름 한가롭다.해발 7백 이상의 고원(高原)의 맑은 공기 때문인지 길 가 코스모스 백일홍 당국화 달리아 꽃빛은 천상의 꽃인양 화려하다.

'안도현'을 지나 '명월호'에 이르니,팔월말에 여긴 벌써 가을이라 버들과 이북에서 사스래나무라 부르는 하얀 자작나무가 호반에 노랗게 낙옆 지고,산에는 들국화가 만발하였다.

두 시간만에 이도백하(얼따오뻐허)에 닿으니,여기서 혜란강과 또하나 강이 나눠져 옛날 백두산 미인송(美人松=beauty pine) 벌목한 뗏목들 줄지어 흘러간 곳이다.
계곡 양안에는 수십개의 온천이 분포되어 산속에 무럭무럭 피어오른다는데,키가 30미터나 되는 미인송 끝없는 솔숲 아래로 차가 달리니,여기부터 백두산 발치가 된다.

여기가 시베리아 동북 호랑이의 고향이며 흑곰과 표범 담비 시라소니 사슴의 서식지로,이 광활한 장백 임해(林海)에 야생식물 2540종 야생동물 1500종이 있어 자생하는 산삼을 비롯 장뇌 등 약초를 휴게소마다 팔고있고,차가버섯 쌍황버섯 우황청심원 자수(刺繡) 소개하는 '만경대 전시관' 북한 아가씨는 용모도 이쁘거니와 이북 사투리 목청이 곱기도 하다.

장백폭포

버스가 다섯 시간 여정을 끝내고 닿은 곳이 장백폭포 밑이다.
이 지점은 제주도 서귀포 일대처럼 지금까지 완만 평탄하던 오름이 끝나고,산이 적갈색 화산석 급경사로 치솟으니 해발 2200 지점이다.여기부터 자작나무 숲은 사라지고 키 작은 들쭉숲과 고산초원이 펼쳐진다.백두산의 봄은 7월이라 화려한 고산초원의 야생화 축제는 볼 수 없었다.

통제소에서 입산 티켓 끊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멀리 웅대한 두 봉우리 사이 협곡에 흰 명주필을 걸어놓은 듯 은하수처럼 하얗게 날아떨어지는 것이 그립고 그립던 장백폭포의 모습이다.백두산 16개 폭포 중에서 높이 68미터로 낙차가 가장 크고 가장 웅대한 저 폭포는 멀리 운무에 덮힌 천지(天池)서 흘러온 티 한점 없이 맑은  천상수(天上水)다.

이 천상의 물이 혜란강 도문강 송화강 되어 드넓은 만주벌판을 적셨으니,상고(上古)의 고조선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 선조들의 웅혼한 제국은 천상수를 마시던 민족이 이룩한 것이다.

온천수 특유의 주황색 녹색 천연색 천화가 일어난 바위 위로 계란이 익는다는 온천수가 흐르는 곳을 따라 올라가서,장백폭포에서 떨어진 천상수 한모금을 마시니,새삼 남쪽 반도 밑으로만 끝없이 남행하여 수도(首都)를 정하는 고달픈 백두산족의 족적이 서글퍼진다.

제국(帝國)의 역사

처음 북만주에 제국을 일으킨 분은 환인(桓因)임검(=임금)이니,환인이 '사람에게 크게 유익하게 하기'(弘益人間)를 가르쳤고,환인은  환웅(桓雄)에게 무리 3천명과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나라를 세우라 명하셨다.

환웅이 기원 전 2333년 상달(上月) 풍백(風伯)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처음 나라를 연 곳이 백두산 검벌 신단수(神檀樹) 아래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일컬는다.

환웅께서 곰족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시니 곧 단군(檀君)이시며,단군은 서울을 백두산(=태백산) 아사달(阿斯達) 임검성(壬儉城=한배검성)에 정해,나라 이름은 '배달' 혹은 진단(震旦)이라 하였다가,서울을 송화강변 당장(唐莊)에 옮겨 평양(平壤)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동부여에서 동명성왕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우니,수도는 대동강변 평양이었고,고구려 멸망 후 명장 걸걸중상(乞乞仲商)의 아들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수도는 용천부였다.

고려는 다시 남하하여 수도를 개성으로 삼았고,조선은 다시 남하하여 수도를 서울로 정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대전권으로 후퇴하니,초라한 이꼴로 어찌 우리가 감히 백두산족 후예라 자칭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