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스님들

by 김현거사 posted Jul 31, 2005 Views 5922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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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스님들

백운(白雲)스님은 쌍계사에서 난 키우던 스님이었다.
법호(法號)처럼 청산백운(靑山白雲)같이 맑은 시를 쓰시던 분이다.
이문동 뚝방 초라한 전셋집 살 때,가진거라곤 숟가락 두개 밖에 없던 시절,스님은 석곡(石斛)을 쌍계사에서 들고올라와 선물했다.그때부터 나는 석곡의 난향기를 알았고,매화의 멋을 배웠다.
지금 그분의 행방은 모른다.

당시 시 쓰던 스님은 오현 정휴 지현스님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신문에 시를 싣고,간혹 찾아와 차 한잔 나누곤했다.

그 젊던 스님들도 늙었다.

7년 전 백담사서 만난 오현스님은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대표하는 회주스님이었다.걸레스님 중광과 세사람이 차 마시고,만해스님,고성 이성선 시인 이야기 나누면서 계곡을 거닐다 이별할 때,오현 노장은 내 운전수에게 '거사님 잘 모시라'며 노잣돈까지 쥐어주셨다.
걸레 화가 중광과 이성선 시인은 그 후 타계했다.

정휴스님은 2년 전에 봉화 청량사에 갔더니,도량을 별장처럼 깔끔히 만들어놓았는데,특히 절벽 바위돌 위에 세운 탑과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차실이 멋있었다.산사(山寺) 시낭송 효시가 그 분 일거 같다.

석지현스님의 행방은 모른다.

불교신문에서 상사로 모신 분은 광덕 월주 법정 설조스님이다.

광덕스님은 스님다운 스님이셨다.
용모도 구슬처럼 맑고 깨끗했으며,신문 논설을 쓰실 때면 난해한 한자를 옥편 한번 뒤지지않고 일필휘지로 보는 앞에서 쓰는 박학강기(博學强記)셨고,다른 분들처럼 세속에 연연하지않고 중 본연의 공부에 전념하신 스님이다.
'불광'이란 잡지를 창간했고,만년에는 송파에서 포교에 전념하시다 가셨다.  

월주스님은 주의주장이 강하고 정치적인 모임(청와대 같은 곳)에 잘 나가시는 분이었다.금오스님 문도(門徒)에 월산 월성 월탄 월서 월만 등 월(月)자 돌림 쟁쟁한 고승들이 많다.그 중 한분이다.
개운사 주지로 계실 때,집 없는 기자에게 절 한쪽에 와서 살라고 권해주신 적이 있다.

법정스님은 신문사에 출근만 하면 함석헌 천관우 씨 등과 통화가 많았다.당대를 주름잡던 문필가들이다.
그래 평소에 '법정스님은 글재주가 뛰어나,수도자라기 보담 문필가에 가깝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마침 나의 퇴직 회식시에,스님이 이별주 한잔 권하고 그동안 느낀 인상이 어땠는지 말해보라고  세번씩이나 강권하는 바람에,젊은 때라 그대로 말해서 평소에 애껴주신 스님과 썰렁해진채 헤어졌다.
스님과 어색하게 헤어진 일을 계기로 나는,'사람은 상대가 아무리 수양이 깊어도 너무 솔직히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요즘 스님의 '무소유'란 글을 항간에서 만날 때마다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싣달타는 왕궁도 버리고 출가했는데,출가 수도승이 '문명'(文名)에 연연하면 안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설조스님은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이다.달 밝은 신륵사 앞 남한강에 배 띄우고 우리 신혼 부부에게 절에서 담은 곡주 복분자술 한잔씩 딸아주고 원어 노래 부르던 스님이다.미소가 다정하시던 스님은 미국과 카나다 포교원에 계시다 돌아와서 불국사 주지를 역임하셨다.부부가 꼭 한번 불국사 찾아뵙는다는 것이 공수표가 된 후 소식을 모른다.

돌아보면 초년에 절 집안에 이렇게 좋은 인연 맺어놓고,그 뒤 인생 대부분을 딴 데서 월급쟁이 한 것이 후회된다.
선(禪) 관련 책을 모으고,선이론에 눈밝은 무진장 지견 광덕 경보스님 찾아가 괴롭히고,종정 고암스님 거처까지 찾아가 불쑥불쑥 괴롭혀 드렸었다.

나는 결혼식을 장충동 조계종 총무원 회의실에서 수십의 고승들 축복받으며 했고,축의로 총무원장 석주스님은 '우순풍조(雨順風調)'란 휘호를 받은 귀한 인연도 있다.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10년 면벽수도 후 하산하신 경산스님과의 첫 인터뷰,춘원 이광수 사촌형 봉선사 운허 노장 인터뷰,선(禪) 배우러 송광사 구산스님 따라온 벽안의 하바드 출신 인터뷰도 내가 맡았었다.사월초파일 공휴일 제정,최초의 방송작가 산사 세미나,만해스님 산소 복원 운동 등,당시 절집안 일에 앞장섰고,그 흔적은 아직도 불교신문 제본책에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편집 담당이던 선원빈거사는 '큰스님'이란 책 한권 남기고 타계했고,취재 담당인 나는 지금 늙어가며 그 당시 만났던 큰스님들 부음 소식을 불교신문에서 읽는다.

운허(耘虛) 서운(瑞雲) 월하(月下) 관응(觀應) 경봉(鏡峰) 전강(田岡) 고암 성철 탄허(呑虛) 금오 대의큰스님... ... ...

한분 한분 가실 때 남다른 감회에 젖고,사찰에 가서 이끼 낀 그 분들 부도(附圖)를 보면,삶의 무상을 느껴 합장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