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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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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碧宵寒月을 아시나요?

- 중년에 빠져든 어느 초보산꾼에 대한 일차 보고서(지리종주) -

지리 10경의 하나인 벽소령은 지리산 등줄기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잘룩한 고개로서 일찍이 시인 고 은(高 銀)씨는 "어둑어둑한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이 아니면 볼 수가 없다"고 찬탄하였다. 그러나 비를 머금은 거센바람이 불어대는 새벽의 벽소령은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벽소령산장은 마치 귀곡산장처럼 으시시만 할뿐이다. 전날밤, 가랑비를 맞으며 장장 9시간의 지루한 안개(?)산행을 하고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하였으나 남부지방의 폭우주의보로 인하여 내일 산행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공원관리직원의 안내가 있은 터라, 실망 반 기대 반으로 저녁식사시간에 한껏 소주를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눈을 뜬것이다. 오늘은 음력 칠월 보름 얼마나 그려왔던 벽소령의 밤인가! 수많은 산행기를 읽고 또 읽으면서 몰래한 내 사랑은 이제 이렇게 아쉽게 비바람속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있다.

뒤돌아보면 나는 산을 참 멀리하고 살았다. 20대엔 지리산도 두 번이나 오르는 등 간간이 대중없이 산을 오른 적은 있지만, 아무튼 어쩌다 사내 체육대회로 서울 근교산이라도 오른다 치면 짜증부터 앞섰으니, 산은 내 삶에 있어 결코 가깝지 못한 사이였다. 그런 내가 2002년 1월 26일 사내산악회의 명예(?)로운 초대를 받아 눈 덮인 오대산 노인봉의 시산제에 참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그렇지만 대중없이 오른 노인봉 산행은 온 산하를 백색으로 치장한 단순한 아름다움 외에는 불행하게도 별반 기억이 없다. 단지 중년에 접어들어 산에 미쳐버린 초보산꾼의 첫 산행으로서 앞으로의 산행에 자신감을 불어주는 정도의 가치로 본다면 참으로 소중한 첫 산행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급격하게 약해지는 주량(?)을 생각하면서 건강을 염려하였지만...사실 勞꾼들치고 술담배와 스트레스에 찌들은 일상을 피해가기가 쉽지 않은 터, 운동은 게으른 일상에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노인봉을 오른 이후부터 내 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온다"는 금언을 몸소 실천코자 먼저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노인봉에 함께 오른 사내의 전문 수준 산꾼들의 도움을 받으며 토요산행을 시작하였다.

두 번째 산행은 북한산이었다. 지축역에서 노적사 순환버스를 얻어(?) 타고 노적사 입구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서울생활 십 수년에 처음으로 북한산에 안기는 날, 난 설레임이나 산세의 아름다움 등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오늘 코스는 어떠한지, 내가 오를 수 있는지, 너무 높지는 않은지.. 등등 사실 난 병적인 수준의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드러낸 삼각산(*인수봉·백운대·만경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북한산을 삼각산으로도 부른다.)의 위용은 초장부터 내 기를 완존히 죽여놨다. 아이젠을 차고 조심조심 중흥사지를 거쳐 북한산대피소 그리고 동장대, 대동문에 이르러 멀리 흰 눈속에 오롯이 자태를 드러낸 대남문을 바라보면서 잠깐 휴식. 그리고 아카데미하우스로 빠지는 하산길. 세시간 남짓한 짧고 완만한 코스였지만 당시 나에겐 자신감을 확실하게 심어준 뿌듯한 산행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도심에서만 바라본 북한산의 실체를 새삼 느낀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이후 토요산행과 함께 주말산행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공휴일도 당연히 산속에서 끙끙거렸다.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관악산, 검단산, 예봉산, 수리산, 아차산, 변산, 계룡산 다시 도봉산, 북한산, 검단산, 관악산......20회 산행을 한 날은 북한산 하산길에 연신내에서 성인식 기념주를 마시고, 30회차에는 북한산 공룡능선을 오르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아줌마산꾼들에게 엮여 염초봉에서 넋이 반쯤 나가기도 하고, 비봉능선에서 만난 묘령(?)의 여인들과 진관사계곡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아쉬운 다음을 기약하기도 하고...산행 횟수가 늘어가고 배낭이 퇴색해지고 등산화가 닳으면서 외관상 산꾼의 관록(?)은 더해갔다.

월요일을 맞으면 토요일이 멀게만 느껴지고, 금요일은 어쩜 그다지도 지루하기만 하던지. 일요일 하산길은 헤어짐이 아쉬워 막걸리로 취하였다. 전철에서도 산행지도, 출근길엔 광화문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의 안개를 보면서 산행날씨를 헤아리고, 근무중 자투리 시간에는 등산사이트를 쏘다니면서 고산준령을 넘나들고, 동료들과 점심시간은 온통 주말의 산행이야기로 침을 튀겼다. 사실 동석한 동료가 좋든 싫든 오로지 내 즐거움에 빠져 그렇게 봄날을 보냈다. 혼자 하는 산행이 늘어가고 우중산행도 감사할 뿐이었다.

정녕, 무엇엔가 미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가고 있었다.

허벅지에 근육이 붙어가고 철쭉은 흐드러지게 피고 앞서가는 아줌마산꾼의 엉덩이가 무지하게 커 보이던 어느 날, 막연한 불안과 초조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왜 산에 오르나?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단순히 건강때문인가? 취미로? 성취감? 이까짓 서울 근교산 백번 오르면 뭘 해. 진짜 산다운 산 엄청 큰산을 올라야지. 내가 오를 수 있을까? 근데 왜 올라야 하지? 저기 앞에 가시는 엉덩이 무지하게 크신 아주머니 힘든데 왜 올라갑니까?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고요? 에이 그건 너무 진부합니다. 다람쥐처럼 잘도 가시는 영감님 이 더운 날 왜 사서 고생하십니까? 어이 젊은 양반 모르는 소리 마소. 산을 오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일세. 나라는 실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거야. 산다는 것 즉, 삶의 의미를 말일세. 오르는 길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려가는 길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 있고 그러다 봉우리에 오르면 다시 하산하는 것. 이 것이 산행이고 삶이라네. 영감님 너무 어렵습니다. 저기 날렵하게 바위를 내려오시는 선생님 왜 위험하게 바위를 하십니까? 내가 세상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오. 생활에 변화를 주고 스스로 몸을 내맡기는 것. 능동적인 삶. 이 것이 바로 내가 바위를 타고 산을 오르는 이유랍니다.

아아 누가 말했던가? "일상의 나태와 안일을 떨쳐버리고 불확실성과 모험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길. 산은 단지 그 길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라고....

어머님을 여의고 아카시아꽃향기가 서럽게 흩날리던 날 검단산에 올랐다. 팔당을 흐르는 한강을 보면서 불현듯 '碧宵寒月'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극한의 달빛이 천지에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 속에 내 몸을 누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전신을 휘감아 돌았다. 그래. 지리산으로 가자. 국립공원 제1호로 한국 8경의 하나이고 5대 명산 중 하나라는 지리산으로 가자. 남한 제2의 고봉 천왕봉(1,915m)과 전라도의 주봉이라는 반야봉(1,751m), 노고단(1,507m)으로 이어지는 1백리 능선을 걸어보자. 노고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낙조, 벽소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로 일컫는 지리산 10경을 찾아가자. 뱀사골, 피아골, 대성골.. 골골이 떠도는 빨치산의 원혼을 달래러 가자. 민족의 영산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지리산에 내 지친 영혼을 맡겨보자.

  아버지여
  이땅의 허기진 사람들만 일어나
  어진 아내에겐
  무너지는 웃음을 애써 남기고
  잠든 어린 딸에겐
  열번 스무번 울음 적신 당부 해놓고
  한발 한발 살을 쥐어뜯는 신음으로
  걸음걸이 내디뎠을 반란군 아버지여
  가서는 무엇이 되었는가
  이 마을 저 마을 불어대는 소문이 되었는가
  죽음을 넘어 못다 사른 어둠을 밝히는
  밤마다 울 벌건 달의 가슴이 되었는가
  아니면 아버지여
  피아골 넘어 한번 가서는
  천왕봉 어드메쯤에서 길을 잃었는가
  아니 갈 길을 올 길을 서성이다
  끝내는 주저앉아 천왕봉의 고개가 되었는가
  아버지여 아버지여
  무덤에서 무덤으로 손짓만 하는
  그런 기나긴 밤이 흐르고
  이땅의 아버지인 아들 하나 다시 일어나
  빈 술집에서 장터에서
  붐비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갑자기 불러본 이름 아버지여
  그 사무친 역사여

                          오봉옥님의 「지리산 갈대꽃」

그로부터 두달 여 준비기간을 거치고 마음 넉넉한 산꾼도 몇 명 꼬여서 먹을 것 입을 것 한 짐 배낭에 채우고 밤새 전라선을 타고 구례구역에 내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성삼제에 도착하였다.

지리산종주는 주능선인 서쪽 최고봉 노고단에서 이 산 정상인 천왕봉까지로 1,300~1,900m의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산행코스로 남한의 산 능선 가운데 최장최고(最長最高)의 코스이며, 등정, 하산 거리까지 포함한다면 전체 코스(코스별)는 최소 40㎞에서 70여㎞에 이른단다. 랜턴을 켜고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이따금 졸리운 하품을 해가면서 걷기 40여분, 배낭무게가 예사롭지 않고 왼쪽무릎이 댕기는 듯 은근하게 불안감이 스며들 무렵 멀리 여명 속에 노고단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온몸에 강렬한 에너지가 스멀거림을 느낀다. 그래 할 수 있다.

노고단(老姑壇)은 정상(1,506m)에서 노고단 고개로 뻗어내린 지맥에서 경사 17~18도로 완만하게 전개된 약 100여 정보의 고원으로, 이곳에는 지리산 10경 가운데 하나인 운해(雲海)를 자주 볼 수 있다는데, 방향 탓인지 산장쪽에서는 운해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끝없이 펼쳐지는 산자락에 뿌연 운무만이 고도감을 느끼게 할뿐이다. 많은 산행객들이 아침준비에 부산하다. 부지런한 친구들은 벌써 배낭을 둘러메고 떠난다. 우리 일행도 라면과 김밥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끝내고 용변을 보고(왠 좌변기? 지리산 산장중 시설이 가장 좋음) 길을 떠난다. (06:30)

  10여분만에 닿는 노고단 고개에서 사진 한장 담고 멀리 반야봉과 천왕봉을 가늠해 본다. 숲속의 싱싱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시원한 느낌을 안겨준다. 능선길은 전망이 아주 빼어나다. 지도를 펴보니 남쪽으로 커다란 봉우리가 왕시루봉 능선이다. 그 옆 계곡은 피아골이, 북쪽으로는 만복대 능선과 심원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죽이 무릎께로 자라 보기 좋은 등산로를 얼마간 걷자 너른 풀밭이 펼쳐진 돼지평전(*'돼지평전'이란 색다른 이름은 마늘 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것에서 유래)이 나오고 다시 구상나무, 잣나무 숲길(*이름표가 붙어있음)을 얼마간 감돌아 가면 임걸령에 닿는다. 샘터와 야영장이 눈에 띄는데 지리산 종주능선에서 가장 물맛이 좋단다. 물 한바가지를 마시고 물통의 물도 비우고 새로 가득 채운다.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때의 초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단다. 그는 화살보다 더 빨리 다녔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듯한 전설이 있다. 이 임걸령에서 곧장 남쪽으로 피아골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노루목에서 잠시 다리를 쉬면서 사진도 한 장 담는다. 이윽고 삼도봉이다. (09:00)

낫날봉(등산객들은 '날라리봉'으로 부른다)으로 불리는 삼도봉(三道峰)은 불무장등능선이 흘러내리는 시발점이기도 한 데, 해발 1,550m의 이 봉우리 이름이 삼도봉으로 된 것은 근래의 일이란다. 이 봉우리에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분기하므로 삼도봉이란 명칭은 적절한 것 같다. 높이와 밑변이 40센티 가량인 삼각뿔형의 銅표지판을 보고있노라니 개판이나 다름없는 한국의 정치놀음이 떠오르면서 쓴웃음이 절로 난다. 북쪽으로 반야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보인다. 왕복 90여분 망설이다 포기한다. 2㎞정도를 걸으니 화개재가 나온다. 화개재는 지리산 주능선 가운데 해발 고도가 가장 낮은 곳으로 북쪽으로 200m만 내려가면 뱀사골 산장이 있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2㎞남짓 힘겹게 오르자 토끼봉이다. 여기서부터 오락가락 하던 빗방울이 거세진다. 판쵸를 꺼낼까 망설이다 윈드쟈켓을 꺼내 입고 배낭에도 텐트를 씌운다. 이제 온 산하는 안개로 덮여 지척도 분간하기 어렵다. 계속 주능선을 따라 땅만 보고 걷는다. 이름도 모르는 야생화가 끊이질 않고 피어있다. 산죽은 계속해서 길을 만들고 간간이 고사목이 얼굴을 비추는데, 마치 장승처럼 날 지켜본다. 두려움 아니 경외감 때문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울창한 침엽수림과 오르막과 미끄러운 바위벼랑길을 정신없이 걷다보니 두런두런 사람소리가 들린다. 연하천산장이다. 총각샘도 명선봉도 무심결에 지나친 것이다. (11:45)

연하천(烟霞泉) 산장은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리잡은 아담한 건물로 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단다. 개인이 운영하는 이 산장은 노고단산장을 호텔급으로 친다면, 여인숙 수준이다. 벽소령이나 세석산장은 장급여관...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시설은 여러모로 열악하다. 다만, 산장앞으로 콸콸 쏟아지는 샘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한 것이 산장의 풍취를 더 해준다. 비는 계속 내리고 우리일행은 취사장 처마 밑에서 밥을 앉히고 삼겹살을 굽고 소주도 한잔. 숲 속에서 키 만한 배낭을 둘러멘 아가씨가 모습을 드러낸다. 노고단에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줄여온 터 반갑게 인사한다. 그녀도 능선종주 중으로 오늘 목적지는 벽소령이란다. 처마 밑에서 일행을 기다리는 그녀가 빵과 귤을 권한다. 얼굴선이 곱다. 이러 저러 맴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먼저 길을 떠난다. (13:15)

안개와 비바람속에 한참을 걷다보니 안개속에 특이한 모양의 장대한 바위가 마주선다. 높이 약 10m의 두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이다. 지도를 펴보니 '형제봉' 이란다. (14:20)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전설도 있다. 오르락내리락, 끝없이 이어지는 너덜지대, 무릎이 뻐근하면서 마비증세가 온다 싶더니 벽소령산장이다. (15:10)

지리 10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한 벽소령은 종주코스의 중간지점이다. 오늘의 목적지를 계획보다 1시간여 빨리 도착했다. 지리산 등뼈 한가운데 벽소령의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르러 사람들은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른단다. 그러나 개이지 않는 날씨는 달은커녕 내일 산행조차도 불투명하게 한다. 공원관리사무소직원이 방을 배정하면서, 기상특보가 발효중이니 별도지침이 없이 새벽 독자출발을 금한다고 사뭇 심각하게 주의를 준다. 저녁을 일찍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전날 열차에서는 단체여행객들의 소란으로 한숨도 못 잔 탓에 하루종일 걸은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는 듯하더니 눈을 뜨니 새벽이다. 8시간은 족히 잔 것 같다. 동이 트면서 비는 개이고 바람도 다소 잠잠해졌다. 하나 둘 산꾼들이 길을 떠난다. 우리 일행도 짐을 챙기고 곧 뒤를 따른다. (07:00)
이른 아침 산길이 참 좋다. 다리상태도 말짱하고 어깨 짐도 한결 가뿐하다. 흙 길도 부드럽다. 안개속에서 한바탕 오르막길을 지나니 넓다란 평지와 함께 몇몇 산꾼들이 아침을 먹고 있다. 선비샘이다. (07:50)

어느 새 덕평봉을 지난 것이다. 샘이라고는 하지만 파이프에서 나오는 물이라 정취는 없다. 여기서 세면을 하고 빵과 커피로 아침을 간단하게 마친 다음 출발한다. (08:20) 선비샘에서 아주 전망이 좋은 기암기봉의 칠선봉(1,576m)에 닿는 것은 40여분이면 된다. 한 땀을 들이고 나니 멋진 봉우리가 나온다. 여기가 칠선봉인가? 사진 한 장을 담고 긴가 민가 일어선다. 조금 더 걸으니 기막힌 봉우리들이 우리를 맞는다. 표지판이 찰선봉임을 알려준다. 칠선봉은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자욱한 안개뿐이다.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는 틈을 타 암봉들의 자태가 살짝 엿보인다.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냈으나 다시 안개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아쉬움 속에 한참을 쉬다가 다시 출발한다. 이제 영신봉(1,556m)에 닿기까지 한 바탕 땀을 흘려야한다. 이 코스가 종주코스 중 가장 힘이 든단다. 마음을 굳게 먹고 힘차게 걷는다. 두어 차례 암봉을 넘고 경사가 급한 돌투성이 길을 지나 영신봉 능선에 올라선다. (10:30) 오르고 보니 그리 힘이 드는 코스는 아니다. 다만, 영신봉에 오르면 마치 등정을 완료한 듯한 쾌감을 맛본다고 했으나 진한 안개로 지척을 분간키 어렵다. 조금 내려가니 안개속에 세석산장이 모습을 나타낸다. (10:40)

여기가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철쭉군락으로 유명한 둘레 12㎞, 약 30만평의 방대한 세석고원이다. 여기서는 매년 6월 첫째주말 철쭉제가 열린단다. 비스켓 등으로 간단한 간식을 하고 길을 재촉한다. 완만한 능선으로 오르는 길 좌우로 야생화가 지천이다. 게다가 일부는 습지대로 물이 흥건하다.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바람이 불면 안개가 걷히면서 멀리 능선의 완만한 사면자락으로 야생화 무리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절경이다. 동쪽으로 부지런히 걷는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오르니 촛대봉(1,703m)이다. 마치 올망졸망한 바위들로 촛농이 흘러내린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 한 장 담고 다시 걷는다. 계속해서 운무는 하늘을 가리고 기암과 고사목, 야생화와 산죽 그리고 너덜길을 함께 하다보니 장터목 산장이다. (13:00)

그 새 일출봉과 연하봉을 지났다. 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새벽 일찍 3㎞를 다시 가야 한다. 장터목은 지리산에서 노고단과 함께 가장 붐비는 곳이다. 사통팔달로 등산로가 열려있고, 천왕봉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날 남쪽의 시천(矢川)주민과 북쪽의 마천(馬川)주민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였다는 이 장터목은 남쪽으로 중산리계곡 코스가, 북쪽으로는 하동바위 코스가 연결되어 지금은 등산객들로 날마다 장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라면에 햇반을 곁들여 늦은 점심을 들었다. 오늘 발품을 다 팔았다는 성취감과 여유로움으로 느긋하게 소주도 한잔했다. 연하천에서 허허로운 수작을 건넸던 아가씨가 벤치에서 홀로 커피를 즐기고 있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녀는 장터목에서 숙박하고 내일 새벽에 천왕봉에 오른단다. 일출이 기대되지 않아 우린 오늘 천왕봉을 올라 중산리로 하산 할 계획임을 알려주면서 아쉬운 작별을 한다. 북한산에서 재회약속을 하였지만 아쉽다. 화장실에 들러 반야봉 쪽을 어림해 보고 이내 길을 떠난다. (*장터목산장의 화장실은 작년에 좌변기로 개수하였는데 남자칸에서는 창문밖으로 반야봉이 보인단다.)

돌비탈 길을 따라 오르면서 고도를 높이다가 이윽고 고사목이 장승처럼 박혀있는 고사목지대를 지나 제석봉에 다다른다.  원래 제석봉 일대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잣나무, 구상나무 등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뒤덮고 있었는데 자유당 말기 대규모 도벌로 무참하게 나무들이 짤려 나갔단다. 이것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일게 되자 도벌의 증거를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의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앙상한 몰골로 고사 시켜버린 것이다. 제석봉 이정표에서 철사다리를 타고 내려서 얼마간 비탈길을 따라 오르자 통천문(通天門)에 닿는다. 통천문은 예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 하늘로 오르는 길목이란다. 그러나 암벽 벼랑 사이로 통로가 있는데 철사다리가 가로 놓여있어 이름에 걸맞지 않다. 계속해서 벼랑길과 철사다리가 이어진다. 안개속에 보이는 건 암괴뿐이다. 얼마간 암괴와 씨름하다보니 갑자기 거대한 암괴덩어리가 길을 막는다. 허겁지겁 오르니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표지석이 안개속에 자태를 드러낸다. 아 여기가 천왕봉인가! 성취감보다는 허허롭다. 광주지소 근무 때 당일로 백무동에서 오른지 십수년 만에 다시 천왕봉에 오른 것이다. (15:08)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지리산의 정상이자 남한 육지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208번지, 그리고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00번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발원지로서 성모석상(*지금은 중산리 천왕사에 옮겨져 있다함)과 고려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 봉안 등에 얽힌 많은 설화가 담겨있는 이 영봉은, 근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어 장터목~천왕봉 구간 3㎞와 로타리 산장~천왕봉 구간 3㎞ 등산로의 훼손 상태가 극심하고 천왕봉자체도 산사태를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단다. 이에 따라 관계 당국은 로타리 산장~천왕봉 구간의 자연휴식년제 시행을 검토하고 있다하니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진 천왕봉이 쉽게 손상을 받지는 않을 것이나, 이 영봉이 신성한 봉우리로 자리 할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조처가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두달여 준비기간과 체력보강 그리고 악천후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하여 힘겹게 오른 천왕봉이지만 머무는 시간은 짧았다. 사진 몇장을 담고 이내 하산길에 오른다. 우리일행이 택한 하산코스는 지리산 종주산행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하산 루트로써, 남쪽의 법계사와 로타리산장을 거쳐 중산리로 가는 중산리코스이다. 천왕봉 암봉 아래편에 있는 천왕샘을 거쳐 망바위, 칼바위를 경유하는 이 코스는 9㎞정도로 가장 빠른 하산길이다. 급경사와 너덜지대, 지루하게 놓여진 돌계단 등을 하염없이 걷는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지만 고봉들은 운무에 몸을 감추고 여간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무릎께가 뻐근하니 마비증세가 보인다. 어께에 멘 배낭이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몸은 관성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멀리 산자락에 마을이 보이는가 했더니 어느새 매표소에 도착했다. (19:00)

이틀간을 지리와 함께 한 여정이지만 지리는 끝내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종주를 마쳤다는 성취감보다는 지리를 보지 못한 섭섭함과 미련으로 허탈하기만 하다. 내 마음속에 몰래 키워온 지리사랑은 정녕 무엇을 얻고자 함 이였던가! 아 누가 말했던가! 산은 스스로 뜻을 세우지 않는다고 다만, 그 산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이들이 제 삶의 고달픔과 꿈을 거기서 읽어낼 뿐이라고....매표소근처 마을에서 막걸리로 하산의 아쉬움을 달래는 사이 어둠에 휘감긴 지리는 태고의 정적으로 가라앉고 그 위로 칠월보름 만월이 처연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산들이 시시각각으로 내보여주는 천만가지 즐거움을 하나라도 거절해서는 안된다. 무엇이든 배척도 제한도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드려야 한다. 굶주림과 목마름도 경험해보고, 빨리도 느리게도 걸을 줄 알고, 때로는 명상에 잠겨보자. 예측할 수 없는 무한한 변화야말로 인생의 맛이 아닌가.
                                                                            - 가스통 레뷔파 -


                                                                         2002년 8월   50회 산행기

  • ?
    얼간 2004.02.26 22:42
    세세하고 예민한 통찰 솔직 담백한 감정의 노출 무척이나 감사하게 접할수 있었습니다 안무속에 감추어진 지리산님 더욱 신비했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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