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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산의 추억

조회 수 2861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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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요일 오후.
천관산 억새숲에 취해서 하산이 늦어졌습니다.
해 저무는 남쪽을 따라 인적없는 길을 내려오는데
작은 절이 있는 곳에서 산길은 끝났습니다.
산 깊은 절이라 버스도 다니지 않고.
큰길까지는 너무 멀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길로 하산을 하지 않았나 봅니다.

절에 들어가 물어봅니다.
버스는 없고, 택시를 불러야한답니다.
잠깐 실망의 기운이 스치는 우리에게
그 노스님 하시는 말씀.
자기가 불러줄테니 택시비는 걱정하지 말랍니다.
.....?
마침 신도 한 분이 다가오십니다. 목적지가 같으니
여기서 저녁 먹고 이따 자기 차로 같이 나가자고 하십니다.
멋들어진 기와도 없고 스레트(?)로 얼기설기 지붕을 얹은 절간으로 들어갑니다.
맛있는 고사리나물에 따끈하게 김이 모락모락.
이제 막 지은 밥을 감사히 받으며 나물을 들춥니다. 생선이 숨어있습니다.
"많이 묵어. 고기 숨겨놨응게."
"....?"
"스님이 몸이 안좋으셔서 고기 드셔야한대요. 이상하게 생각지 말고 많이 먹어요."

"우리 애기들. 커피도 한 잔씩 마셔야제. 헤즐넛이 향이 좋당께."
"아따 스님. 애들이 무슨 커피다요."
"아니제. 애들잉게 커피 더 좋아하제. 아까 보살님이 주고 가셨응게 내가 맛나게 타줘야제."
우리는 우걱우걱 밥을 먹느라 말이 없지만, 넘치는 대접에 황송해서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스님이 커피와 과자를 들고 나오십니다.
노스님은 연세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몰라요. 젊을 때 일본유학도 갔다오시고 방송국 편성국장도 하시다가 나중에 스님이 되셨대요. 여기저기 돌다오셔서 그런지, 바다같으세요. 나도 그래서 세 시간씩 걸려도 이 절에 와요."
역시나 표정이 맑은 보살님이 웃으십니다.
"우리 스님 연세가 팔십 하나에요."
세상에나. 저렇게 맑으신 눈빛에 피부에...
스님에겐 세월이 투명한 물처럼 흘러갔나봅니다. 아니 물처럼 흘려보내셨나 봅니다.

보살님과 공양주스님과 노스님의 넉넉한 대접에
따뜻해진 마음으로 차에 오릅니다.
느릿한 걸음으로 스님이 절 문까지 배웅을 나오십니다.
털모자를 푹 눌러쓰신 모습에도 미소가 보입니다.
볼 것 없이 초라해서 지나칠 뻔했던 그 절을 다시 바라봅니다.

2.

지난 밤에 두 시간밖에 못잤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친구는 벌써 잠에 골아떨어졌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조금 긴장이 됩니다.
두 시간 반 동안 어떻게 재미있는 '조수'가 되어드릴까.
따끈한 몸에 따끈해진 마음. 졸음이 슬슬 옵니다.

다행히 보살님의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저는 추임새만 넣어주면 됩니다. 아. 네. 그렇군요.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시는 건강한 아주머니...
"내가 아들 하나 있는데, 고 1이거든. 근데 공고를 갔어. 싫은  내색은 안하는데 그래도 마음 다독이기가 어렵더라고. 아닌척 하다가 결국 스님한테 털어놨지. 근데 화를 버럭 내시는거야. "
"어떻게요?"
"니 아들만 1등하고 니 아들만 잘나야되느냐고.....맞지"

맞습니다. 스님의 너털웃음이 떠오릅니다.
한참이나 외진 길은 이미 칠흙 같습니다.
"세상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 남들은 어떻게 보든지간에. 내 의지대로 이루고 주변 사람 잘 돌보고... 그랬는데. 서른 다섯에 무너지더라고."
"네?"
"그러니까. 스님한테도 말씀 안드렸는데. 참. 시월 되니까 내가 별 소리 다하네.."
"......"
"아들 밑에 딸이 하나 있었거든. 네 살이었는데. 얼마나 이뻐했는지. 너무 이뻐서 아픈가 안아픈가 눈에 넣어볼까도 싶게.... 근데 나 일하는데 같이 가다가 차에 치어 죽었어."
".......!"
"그러잖아. 일찍 갈 자식한테 유난히 잘해주는 법이라고. 그럴 애였나봐. 주저앉아서 못일어나다가 절에 다니기 시작했지. 여기 오면 마음이 비어지는 것 같거든."

눈앞에서 죽은 어린 딸아이를 더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졸음은 화드득 날아가버리고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그래도 아직 맘이 다 비어진게 아닌가 어쩐가. 시월만 되면 더 절에 가고 싶더라니까. 딸애가 시월에 갔거든. 아이고. 내가 무슨 청승이냐 지금. 허허"

"스님은 정말 연세를 초월하셨어. 아빠같고 바다같고. 와서 쓴소리도 듣고 마음도 다독이고. 연로하신 분이라 돌봐드리기도 하고.... 스님은 어쩌다 돈 생기면 읍내 애들한테 쏟아부으셔. 아가씨도 여기 가끔 들러서 스님 이야기도 듣고 놀다 가. 노인이라 가끔 안부전화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

3.

냉정하지 못해 일부러 두꺼운 껍질로 위장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 작위를 감당하지 못해 와르르 무너집니다.

남해의 산은 오를수록 사람의 들녘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입구의 절이 보이고, 들판이 보이고, 읍내가 보이고, 남해바다가 보이고...
죽어라 올라서면 사람의 숲이 아스라이 보이는 지리산과 다릅니다.
기를 쓰며 벗어나더니, 막상 닿을 수 없게 되니까 그리워 바라보는.
경계인의 청승을 떠는 곳이 지리산입니다.
하지만 늘 그 자락에 서고 싶은 마음은 타오르기만 할뿐,
식을 줄 모릅니다.

그렇게 천관산 억새숲에 앉아 사락사락 바람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화장을 하지 않다가 산에 갈때는 썬크림을 바르고 파우더를 덧칠합니다.
그래도 기미는 생기고 콧등은 썬크림이 뭐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눈부신 억새숲에서 문득 거울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파우더 탓인지, 눈 아래 주름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나도 주름 생겼네. 예전에는 오락가락 하더니. 아예 정착을 해버렸네그려."
"야. 우리도 나이 먹고 있어."

우리도 '벌써' 스물 여덟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나 요즘 웃겨. 스물 아홉은 아예 잘라먹고 서른 타령하고 살잖아."
"자꾸 정리하는 모드구만."
"그런가봐. 꿈을 쫓는다고 바둥거렸는데. 지나고 나면 왜 몽땅 도매금으로 바보같지. "
"그래도 너 열심히 살았어~"
"파일 하나 만들면 빽인가 뭔가. 암튼 빽업파일 하나씩 몰래 생기잖아. 바보같은 기억만  몽땅 빽업파일에 쌓여서 나중에 들춰보면 그것만 남는 거야."
"얼라?"
"황당하고 부끄러워 현재에 몰두가 안돼... 쥐구멍 하나만 파주라."
"호미도 없고 삽도 없는디."
"돈만 번다고 들어앉은 지금이 차라리 편해. 최소한... 더 이상 오류는 안만드는 것 같거든."
억새숲에서 나는 금새 스물 아홉을 잘라먹었습니다.

차는 벌써 도심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언제 한 번 그 절에 다시 가고 싶습니다.
스님의 너털웃음을 들어도 좋고. 바보같은 빽업파일을 풀어놓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두꺼운 껍질을 함께 무너뜨려 주었으면 합니다.

'스님 그거 아세요. 제가 그 산에 간 건 지리산을 잊어보려고 간 거에요. 바보같은 짓을 또 했거든요.'
'바보라...'
'스님 제 인생에 마음을 놓아본 대상이라곤 지리산 뿐이에요.'
'인생이라...'
'어쩌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있는데 최근에 정리했지요. 마음도 다독였고. 제가 얼마나 바보였는지도 충분히 알았구요. 근데 다시 산에 가는 길에 왜이리 잡념이 많지요? 골목에서 만난 사람이면 그 길 다시 안가면 되는데. 난 지리산에 안가면 안되겠는데요! 말릴 사람은 없죠. 그 산길은 피해가면 되고. 근데 지리산만큼은 맘 편하게 가고 싶어요.'
'껄껄...'
'어라. 스님 그것만이 아니에요. 저는 두어 달에 한번씩은 꼭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어요. 갈수록 끔찍해져요.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그 죄가 만만치 않은가 봐요. 어쩌지요."
'껄껄...'
"잉? 스님 앙꼬는 사실 그게 아니구요. 실은요... 군시렁군시렁..."
미리 대본을 풀고 있는 내가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미리 알 내용이면 스님을 찾아가 풀어놓을 리도 없고
가이없는 스님의 화답을 저 따위가 미리 알 턱도 없지요.
억새숲에서 올챙이 주름을 붙들고 파일타령을 한 모습도 떠오릅니다.

4.

아주머니는 우리를 집 근처에 내려주십니다.
너무나 고마워 차 문에 머리가 박히도록 인사를 합니다.
아주머니 가시는 걸음이 훌훌 가벼워지기를, 자꾸만 빕니다.
"야. 맥주 한 잔 해야지"
"당근이지. 우리 오늘 넘치게 복을 받았으니 어디다 나눠줘야 하는데."
"어라. 금새 말이 사찰 모드네."

습관대로
스물 여덟 우리는 쥐구멍 대신 호프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억새. 일몰. 남해바다. 목탁소리... 그리고 사람들.
넘치게 복된 하루였습니다.
술 기운이 오른 나는 또 느슨해졌습니다.
'에이 몰라. 내 우찌 알것이야'
억새숲에서 본 지리산을 억지로 떨쳐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음악 - Snowman Walking In The Air  / George Wisnton

  • ?
    허허바다 2003.10.29 15:37
    아름다운 사람들... 그래요 집착치 마세요... 이 쌀쌀한 오후에 많은 사연이 담긴 아름다운 글을 잘 읽었습니다... 해연님 ^^*
  • ?
    오 해 봉 2003.10.30 00:50
    이글은 산행기가아닌 아름다운 서사시이네요.
    베풀고.사랑하고.자기발전을위한 성찰.
    글도 사진도 참 좋으네요.고맙습니다.
  • ?
    나그네2 2003.10.30 09:41
    해연님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세월속에서 크게 한번 놓아 버리세요
    '우리 오늘 넘치게 복을 받았으니 어디다 나눠줘야 하는데."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네요. 선업도 악업도 업은 업이니......
  • ?
    moveon 2003.10.30 12:34
    천관산 주봉 근처의 단풍도 아름다울 것인디. . . 억새는 예년만 못하다든디 해연님 앞의 억새는 싱싱하구먼요. 그래요. 세월속에선 놓지 않고는 안되는 거랍니다.
  • ?
    해연 2003.10.30 13:30
    와라락 써놓고보니 님들 앞에서 징징대는 꼬마가 됐네요. 부끄러븐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음에 새길께요. 부끄럼민망글적글적...
  • ?
    지나가는이 2003.10.31 16:12
    군더더기 없이 글을 차암 잘 쓰시네요.
    마음에 쏙 와닿아서 몰입을 했습니다.
    서정시를 읽는 느낌입니다


  • ?
    부도옹 2003.11.01 01:04
    남쪽으로 내려가다 만난 절이라면 혹, 탑산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흔히 천관산은 관산쪽에서 오르는데 오직 대덕쪽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탑산사가 있는 등산로 입니다.
    네, 버스노선이 장흥군까지 오직 하나 뿐인 곳이랍니다.
    고향마을 뒷산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
  • ?
    해연 2003.11.01 14:18
    네 부도옹님 탑산사 맞답니다. 님의 고향마을이라니 더 신기하고 정감이 가네요. 참 그리고 님 덕분에 광주의 장비점 구경 잘하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 ?
    길없는여행 2003.11.03 12:10
    참 잘 읽었습니다. *^^**
    꺽기지 않은 억새풀 모습이 보기에 좋군요.
    누구나 다 두꺼운 껍질을 그 두께가 다르지만...가지고 있는듯합니다.
    한겹 한겹 나이따라 세월따라 두꺼워지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 두꺼운 껍질을 한겹 한겹 벗겨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듯 합니다.
  • ?
    김현거사 2003.11.11 10:15
    소성님 글 한번 더 읽으려 들렸다가 해연님 글도 읽었읍니다.방년의 큰애기 글솜씨 수준에 놀랐읍니다.청춘! 아름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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