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지리 체질일까?

by posted Jul 27, 2005 Views 4401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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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7.27.수요일 부산에서
15년 전의 그녀들과의 해후를 작정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해후의 안타까움을 달래려고 지금 빛 바랜 그 때의 사진을 들추어 본다.

3년 6개월간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무한자유를 만끽하던 23살 여름, 나는 야인을 추구했다. 야인으로서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그녀들을 꼬드겨 고 3때 올라서 그 매력을 알아버린 천왕봉을 다시 올라 정상석을 끌어 안으려고 했다. 여자 셋만 가면 지리 깊은 계곡의 이무기들이 얕볼까 봐 그녀의 남자친구 한 명을 보태었다. 마산역전의 시계탑에서 모여 백무동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백무동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장터목에서 텐트를 친 뒤 줄을 한참이나 서서 받은 물로 저녁밥을 지어먹었다. 태양이 남은 빛을 주섬주섬 거두어 들일때 까마득히 먼 산봉우리에 걸린 거대한 먹구름 두 개가 점점 공간을 좁히더니 부딪쳤다.  순간, 빛이 번쩍였고 쿠왕하는 소리가 온 지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금, 그 산봉우리가 어디쯤이고 무어라고 불리는지 알고싶다. 보기드문 장관을 구경하던 초저녁으로 첫날밤의 황홀함은 끝이었다. 물갈이로 설사병이 난 친구를 밤새, 화장실까지 따라가 문 앞에서 보초를 서야 했으니까.

↑둘째날. 늦잠때문에 일출을 놓치고 뒤늦게 올라선 천왕봉 정상

↑죽은 나무인데 명칭을 도통 알 수가 없다. 구상나무인지 상사목인지.
우리가 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을 때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누군가가 '그 나무에 올라가면 안 돼요' 라고 말 해주기를.
지금 이 사진을 접하는 오브넷 가족 여러분의 질타가 있으리라 보며 그 꾸중을 달게 받으려고 한다.
철 없을 때의 일이니 애교로 봐 주시겠지......

↑여기가 어드멘지 도통 알 수없다.
천왕봉을 오르기 직전인지  천왕봉을 내려서는 길인지.

↑천왕봉에서 세석평전을 지나 한신계곡으로 내려왔다.  
마지막날 밤 백무동 계곡에서 우리는 서로의 보초가 되어주며 몸에 배인, 지리산행의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내렸다. 텐트 안에서 아쉬운 이별의 소주잔이 돌았고 노래를 부르다가 지쳐 우리의 지킴이었던 그녀만의 남자친구의 배에 우리 셋은 나란히 머리를 쳐박고 잠이 들었다.

지리등반 내내 배가 고프지 않았다. 기운이 마르지 않는 샘물마냥 솟고 솟았다. 2박3일 내도록 지리의 생수만을 목구멍으로 넘겼을 뿐인데. 그 때 내 육신이 왜 그러했었는지 지금도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시 내가 마신 지리물에 땅 속의 산삼뿌리가 씻겨내려 스몄던 것은 아닌지 추측할 따름이다. 삼일만에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일만에 살이 쏙 빠졌네 허허......."
지리산에 다녀온 나는 목덜미는 그을려서 새까맸고 눈에선 광채가 났으며 몸짓 하나하나가 날렵한 생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타고난 지리체질이었던 것이다.
지리산엘 오르려면 남편의 동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멍에를 뒤집어쓴 주부가 된 지금, 확인하고 싶다. 아직도 내가 지리체질인지를.
아는만큼 보이는 것이고 아는만큼 느낀다고 했다.
지금은 오브넷으로부터 지리산을 보고 배운만큼 미래의 안기고야 말 지리산의 느낌은 15년 전에 보던 지리산의 느낌보다 감흥이 더할 것이라고 짐작되고 보니 미리 설레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