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오버랩...

by 편한세상 posted Dec 01, 2004 Views 2828 Replies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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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디고 혈기만 왕성했지
좌충우돌하며 어리벙벙한 직장 초년병 시절... 다니던 직장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악회에서 신년산행을 계획하여 다니곤 했습니다.

그해 코스는 지리산(화엄사~노고단~뱀사골~반선)산행을 결정하여
12월31일 종무식을 마치고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장도에 올랐죠.

출발 전날 산악회 총무가 고지한 준비물에 듣지도 못한 아이젠,스패치,
방한복 등이 있어 평소 준비에 철저한(?) 나는 남대문에 가서 그 비싼
비블암 등산화(무게 엄청남)에 눈에 뒹글어도 방수되는 오버 자켓,바지,
아이젠,스패치...,거금 들여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첫 지리산 산행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산악회 주관이라 전 직원이 참석한 것이 아니고 젊은 사장님(그 당시 38세)을
포함하여 직원들,직원가족,포함하여 약 4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40대 남녀, 30대남녀, 20대 남녀, 10대 남녀(초등생)..., 연령,성별 다양(?)합니다.

그믐날 저녁 화엄사 근처 민박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해 먹고 tv에서 울리는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가는 해와 오는 해를 만끽하며 늦게 까지 술좌석이 끝나질
않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20대 처녀, 총각들은 근처의 나이트클럽까지
섭렵하더군요. 저도 그 중의 일원 이었습니다만... 헤헤!

새해 첫날 02:00 드디어 일행들은 노고단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당시 헤드랜턴이 있었나요.그냥 허접한 손전등과 중간 중간 횃불을 들고
긴 행렬을 이루었죠. 산행 1시간 정도 이르자, 갑자기 앞에서 행렬이 멈춰지고
웅성웅성...

산행 안내자(산악회 총무의 친구)의 여친이 넘어져 안경이 떨어졌고, 그안경이
밟혀 도저히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안내자 여친이 산행을 포기하고 하산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덩달아 안내자도 같이 하산한다고 하니, 이런 무책임한 경우가 어디
있냐고 서로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안내자는 길 잃을 염려 없으니 걱정 말라 하며
결국 하산하고, 애꿎은 산악회 총무만 엄청 욕 먹었죠.

우여곡절 끝에 어둠이 겉치는 07:00경 노고단 에 오르자 온통 가스에 바람은 어찌나
세던지... 모두들 라면이나, 행동식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을 준비합니다.
노고단까지 오를때는 아이젠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능선상에는 눈이 많아 아이젠을
착용하라 했는데, 인원 중 아이젠 준비한 사람은 반도 안됩니다. 운동화,청바지...
하긴 지금처럼 장비가 보급화 된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능선을 걸으면서 미끄러워 아이젠 착용 안한 여자들은 점점 선두와 거리는
벌어집니다.안되겠다 싶어 몇몇 총각들 뒤로 쳐저 양떼몰이 하듯 여자들을 몰고
갑니다. 그 와중에 총각들은 여자들에게 아이젠 한쪽을 채워줍니다. 저 역시...

졸지에 절름발이 되는 기분입니다. 완전히 선두와는 떨어지고 가스에 쌓여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주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화개재나
뱀사골 대피소는 어디에 있는건지 도무지... 주능선이 아니라는 느낌도 듭니다.

여자들도 지치고 저희들도 지치긴 매 한가지 입니다. 허기지고 춥고 지치기
시작합니다. 뒤쳐진 일행중 선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라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쪽으로 내려가면 밧줄이 있고 그길로 하산하면 반선이 나온다 합니다.

그런데 그 길 끝이 없는 듯 합니다. 내려오면서 관리부장님 사모님이 넘어져
발목 인대가 늘어났습니다. 총각사원 한 명이 거의 부축하다시피 하여 하산합니다.
그 관리부장님 산행 습관이 항상 일행들 팽개치고 선두에 서서 뒷사람은 어찌됐던
내달리던 분이었는데 뒤쳐진 부인과 초등학교 아들,딸 걱정도 안되었을까요?
무척이나 야속하더군요.

배낭에는 허접한 귤 몇덩어리, 참치 한캔이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기 전
모여 앉아 참치캔을 땁니다. 다들 입맛만 버리고 말았죠. ~쩝. 사장님도 체면
불구하고 달려듭니다. 더 없니? ~쩝

계곡을 건너야 합니다. 징검다리가 있는 계곡은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레 건넜지만
이건 아닙니다. 신발 벗고 바지 겉어 붙이고 건너야 합니다.
남자 사원들, 여자들을 업어서 건네줍니다. 으~ 살로 파고드는 한기가 골 끝까지
올라옵니다. 그 중에 운좋은 총각사원은 내가 평소 염두에 둔 여직원을 업어
나릅니다.

그 동료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결국 그 사건이 연이 되어 결혼에 골인)
나는 펑퍼짐한 아줌마가 당첨됩니다. 내가 아줌마 스타일 이래나 뭐라나...
만약 그때 제가 그 여직원을 업었다면 그여자와 결혼했을까요?
지금도 그 당시 생각하면 혼자 웃습니다.

어둠이 몰려오는걸 느낍니다. 서두르지만 목적지는 왜 이리 안나오는지...
저 멀리 불빛과 어둠속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허~ 02:00에 화엄사를 출발해서 제일 후미가 도착하니
20:30분 입니다. 18시간 30분 그야말로 허기와 추위, 사투였습니다.

먼저 온 일행들이 대기중인 버스 앞에서 밥,고기,술 다 차려놓고 고생했다며
챙겨줍니다. 아~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걸 참고 한마디 합니다. 산행을
많이 해본 경력자들이 후미를 챙겨야지, 길도 모르는 총각들에게 다 맡겨버리면
어찌하냐고 투덜대고 맙니다.큰사고 없이 모두 하산한게 천만다행입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도 그 고생은 치가 떨립니다.

우리가 하산한 길... 아마도 노루목에서 반야봉쪽으로 가다가 이끼폭포 방향으로
하산 한 것 같습니다. 뱀사골 대피소를 보질 못했거든요. 제 추측이지만...
지리산은 그렇게 저에게 안좋은 추억을 남겨 놓았죠.

그리고 산행시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준비 철저,장비 철저...
그리고 안내산악회 절대로 믿지 마십시요. 산에서는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요새 얼마나 좋습니까. 인터넷... 원하는 정보들 쏙쏙 빼낼 수 있고...

그로부터 15년후 2002년 여름,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문득 지리산 종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더군요. 북한산은 매주 다녀 체력에는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거의 처녀 산행이라 생각하고 인터넷을 뒤져 오브넷을 접하게 됐습니다.

김수훈선생님의 초보길라잡이,선배님들의 여러 산행기는 허접한 저를 믿고 따라온
친구녀석들과,아들놈에게 지리산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지리산에 빠져 자주 오브넷을 접하게 되고 올 6월 송정분교에서 첫 오프모임
이후 지속되는 온라인과 오프를 넘나드는 교류속에 점점 그 속으로 빠져드는
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답니다.
좋은님 들과의 만남... 편한세상은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