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어주셔서 고맙습니다,지리산

by 유혜승 posted May 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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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첫종주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몸보다 더디어서 아직까지 그곳에 머무는 듯합니다.
첫날, 걱정스러운 구름을 머리에 이고 출발했습니다. 마음속엔 지리산의 혹독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한편으론 무작정 좋고 설레였습니다.
차갑고 가는 비가 이틀동안 내렸습니다. 마지막날엔 연하봉 오르는 길에 눈부시게 개기도 했지만, 잠시동안만이었습니다. 천왕봉에 올랐을 때에, 산은 자신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워낸 안개로 두터운 막을 쳐 시야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굽이굽이 산을 타며 몸의 지옥도, 절경에서의 황홀도 경험했습니다. 안개로 머리를 감는 길마다 철쭉들이 몽오리져 있었습니다. 잠시 쉬며 쵸코바를 깨물고, 새로 뜬 차디찬 물을 삼킬 때의 싸-한 기분은 참으로..^^
산은 무시무시하게 정직한 노력을 요구해서, 한발한발을 내딛지 않으면 어느 곳에도 이를 수 없고.. 그리고 내리막이 길면 긴 오르막이 뒤따라, 고통의 굴곡에 대해 촐싹대지 말고 덤덤해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산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처음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와 식량과 술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초행길이란 말에, 일정을 늦추시면서 이틀반 동안 동행해주신 아저씨 두 분 덕에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변변치 못하여 토끼봉에서 탈진하자, 배낭을 져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너무 죄송해서 몸둘 바를 몰라하면, '산에선 체면치레하지 말고 도움을 받는 게 좋다'고 하시며 항상 누군가를 도울 채비가 되신 분들. 그분들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넘치게 받은 배려, 다른 사람들에게 꼭 갚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중간중간 마주쳤던, 다리를 다치셨던 분은 지금쯤 다 나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다친 다리로 꿋꿋하게 오르시는 것도 놀라웠고, 먼저 올라갔다 내려와 배낭을 져주셨던 그 친구분도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연하천 산장 아저씨께도 고맙습니다. 친구와 제가 뜨뜻한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기에 눈물을 찔끔이면서도 얼마나 행복하였었는지... 방에서 젖은 옷과 몸을 말리게 허락해 주신 것도 따뜻해진 가슴 속에 넣고 여밉니다.
시간이 무르익어 어느덧 불빛도 스러지고, 칠흑같은 어둠이 빽빽히 들어찼던 지리산의 밤 또한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공간을 암흑으로 첩첩이 쌓아 잠궈버린 밤, 감히 화장실 갈 엄두를 못내었던 그 무서운 밤을 사랑하였습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산행시작 3일만에 그토록 힘겹게 오른 산을, 새끼 발톱들이 아우성치는 발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곤 축복처럼 쏟아져내린 그리움. 이렇게 깊게, 저릿하도록 그리워질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