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 여행기

by 김이정 posted Jan 25, 2006 Views 5221 Replies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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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트를 알게 된것은 저에게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특히 2005년 1월 산행기중
'은희'님의 지리산 3박 4일 종주기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에 혼자서 겨울 지리 종주를 준비하는 여자분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빌 브라이슨의 애팔래치아 산맥 여행기인  A Walk in the Woods 라는 책을 읽고
나도 그런 긴 종주 여행이 하고 싶어 진 것이 12월 이었다. 그후 백두대간 종주기인
'하얀 능선에 서서'를 읽고 점점 더 겨울 산에 가보고 싶었지만 등산이라고는
1년에 한두번 도봉산에 가는 것이 전부인 나에겐 무리인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게 지리산 종주이다.

지리산은 10년전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때 아버지를 따라 한 번 가본 것이 내 지리 경험의 전부이다. 그 때 2학년이던 남동생, 아버지, 나 이렇게 셋이서 2박 3일간 성삼재에서
천왕봉에 올라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종주여행을 했던 것이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는 야영을 했기 때문에 텐트를 비롯해 짐이 많아서
아버지가 참 고생하셨던 기억이 든다. 나랑 동생은 각 6kg정도의 배낭을 매고(그래도
키가 작아서 머리통이 안보일정도의 짐이었던 것 같다) 그 나머지를 모두 아버지가
지셨으니 정말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도 타는 듯한 여름날 항상 동생과 나를 먼저
밥먹이시고 물먹이시고 당신은 가장 나중에 남은 물과 코펠 바닥 눌은 밥을 드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전 준비>
이제 10년이 흘러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되어서 혼자 3박 4일간 지리산 종주를
결심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인터넷을 통한 조사이다. 겨울에 산에서 잔다는 것은
나에겐 정말 큰 위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베란다를 뒤져 아버지가 쓰시던 장비가 무엇있는지 찾아보았다.
일단 큼직한 배낭, 코펠, 버너, 아이젠, 고어텍스 비옷 상하의가 있어서 점검해보니
모두 쓸만했다.
그다음 내 옷장에서 산에서 입을만한 옷들이 무엇이 있는지 잘 뒤져 보았다.
인터넷에 보니 등산의류는 방풍 방수 보온 투습 속건성이어야 한다는데 일단 스키장갈때 입었던 폴라플리스 티와 테니스칠 때 입는 기능성 티, 아크릴과 울 소재의 터틀낵
을 챙겼으나 아무래도 추울 것 같았다. 그래서 동대문에 가서 아주 두꺼운 플리스 자켓을 2만3천원정도에 구입하고 나니 어느정도 안심이 되었다.
하의는 면내복입지말라는 주의글을 많이 읽었지만 등산용 내의를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싼것 같아서 그냥 검은 쫄바지를 입기로 하고 그 위에 보온이 잘되는 추리닝바지를 입기로 했다.
위 아래 입을 것을 챙기고는 플리스 장갑, 스키 장갑, 양말 3켤레, 속옷 여벌, 털모자, 스키 마스크 등을 찾아놓고 그 다음에는 디카, 핸드폰, 해드램프, 침낭, 매트리스를 챙기고 나니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가져갈 장비를 고르는데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무게'이다. 참고로 157cm키에 보통 체격 여자로 등산 초보인데다 배낭이 무거우면 등산이 즐거움보다 고생이 될 것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엑셀에 모든 장비의 이름과 무게를 1g 단위로 적고 합산하여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호화사치품'의 범주에 드는 것들을 과감히 제외시켰다. 터틀낵 스웨터를 챙길 때 옷장에 있는 스웨터를 모두 꺼내 저울에 달고 무게 대비 가장 따뜻한 옷을 고르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다음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 먹는 것이다. 가볍고 취사가 간편하면서도
영양가가 골고루 있고 열량이 충분하며 보존성이 용이한 식품이 무엇인가 마트를 뱅뱅 돌면서 고민했다.  
가장 먼저 고려했던 것이 '밥과 반찬'이지만 밥은 취사가 오래걸려서 연료가 많이 들것 같고 물이 많이 필요한데다 3층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설거지 거리가 생기기 때문에 제외했다. 반찬거리도 마땅한게 없었다. 그래도 밥이 정 먹고 싶을 것같아서 햇반을 2개 챙겼다. 햇반은 220g에 310kcal를 내니 아주 무거운 편이다.
밥 대용품을 찾는데는 다른 나라 등산 사이트를 보면서 외국인들은 산에서 뭘 먹는지
찾아보았다. 그래서
나머지 식단으로는 레토르트 스파게티, 뮤즐리, 통밀빵을 챙기고
간식거리로는 육포, 말린 무화과, 아몬드, 호두, 건포도, trail mix 바, 초코바, 칼로리 바란스, 양갱을 골고루 챙겼다. 3박 4일 기준 8000kcal를 챙겼는데 얼추 알맞은 양이었던 것 같다.
총 배낭 무게는 14kg(물 1kg포함)이었다. 배낭을 매고 아파트 1층에서 11층까지 걸어봤는데 질만한 것 같았다.  

<출발 1일>
새벽 기차를 용산에서 타고 낮에 구례구에서 내렸다. 택시를 타고 화엄사 밑까지 가서 점심을 먹고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30분쯤 걷자 화엄사가 나왔고 산길이 시작되었다. 되도록 땀이 나지 않으면서도 춥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인터넷에서 읽은 바로는 운행 중에는 플리스 티 하나 정도 입고 그 위에 입었다 벗었다하면서 온도 조절을 하라고 되어 있길래 그렇게 했더니 물도 별로 소비하지 않고 노고단까지 갈 수 있었다. 날씨가 따뜻하고 눈도 하나도 없어 걷기 좋은 날씨였다. 간식도 먹고 천천히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이 날 지나쳐 가서 내가 너무 늦게 가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계획대로만 하면 오늘 안에 노고단에 갈 터였다.
노고단에 도착해 2층이 내 자리를 배정받았다. 매트리스와 침낭을 펼쳐놓고 짐을 정리한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스파게티를 먹었다. 속이 뜨뜻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냄비 째 먹은 뒤 빵으로 냄비에 묻은 소스를 닦아서 다 먹었더니 설거지할것도 없고 좋았다. 책꽂이에 책이 많아서 갖다가 침낭에 앉아 읽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2일>
어제밤엔 곤하게 잘잤다. 난방을 잘해줘서 쫄바지에 반팔만 입고도 너무 더웠다.
뮤즐리에 우유로 아침을 먹고 따끈한 코코아를 마셨다. 우유는 200ml팩에든 멸균 우유를 가져왔다. 무게때문에 망설였지만 그래도 먹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들 중엔 잘게 썬 야채에 갖가지 반찬으로 호화스러운 아침을 먹는 사람도 있었서 조금 부럽기도 했다. 사골국물에 떡국먹는 사람도 있고 라면 먹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은 벽소령가지 가야하기 때문에 길이 보일 정도로 날이 밝자 곧 출발했다. 정말 기분좋은 눈길이 이어졌다. 잘 다져져 있어서 아이젠낀 발 소리가 뽀득뽀득했다. 일단 움직이자 별로 춥지 않았다.
2시간 정도 아주 좋은 길이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갔다 계속 가다보니 삼거리에서 반야봉을 가는 길이 나왔다. 원래 계획에는 반야봉이 없었지만 지나가시던 분이 추천하시고 또 왠지 시간이 남을 것 같아서 반야봉에 들리기로 했다. 5분을 미처 가지 못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 반야봉 가는길은 가파르고 눈이 많아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위에서 보는 경치는 참 좋았다. 태극종주를 하신다는 분을 만나서 내려올 때 뒤따라왔는데 식사는 어떻게 하시냐고 물었더니 저녁에 3끼분을 밥을 해서 아침에 라면에 함께 먹고 점심은 주먹밥을 싸서 갖고 다니면 편하다고 하셨다. 그것도 좋은 생각인것 같았다. 반야봉 오를때 어떤 분이 주신 귤이 정말 맛있었다.
반야봉을 내려와서 능선길이 계속 되었다. 화개재에서 참치샌드위치로 이른 점심을 먹고 계속 갔다. 길이 능선의 북쪽에 있을때는 매서운 북서풍에 얼굴이 얼어 붙을 것 같다가도 길이 능선의 남쪽에 있을때는 바람 한점없고 햇볕이 따사로와 봄 같았다. 토끼봉을 지나 연하천에서 남은 참치샌드위치와 뜨거운 물을 마시고 계속 걸었다. 물통에 물이 얼어 붙어서 마치 수정같아 너무 아름다웠다. 중간에 미끄러운 길이 많아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간 곳도 있었다. 그래도 지리산 오기 1주전 포대능선에서 담력 훈련을 했던 덕분인지 그렇게 무섭거나 한 곳은 없었다. 벽소령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힘들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21kg배낭을 매고 오셨다는 등산 매니아 아주머니께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저녁으로 햇반에 리조또를 먹고 어제 처럼 포근한 침낭에서 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

<3일>      
오늘도 어제처럼 후끈하게 난방이 되어 잘잤다. 아침은 뮤즐리에 우유, 코코아를 먹고
장터목을 향해 출발했다. 많이 먹었는데도 가방이 그다지 가벼워진 것 같지 않았다. 어제와 비슷한 능선길이 이어졌다. 그래도 고도가 높아서 인지 세석에 다가갔을 때는 키 작은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헬리콥터가 물자를 날라다 주는 것을 구경했는데 핼리콥터가 다가올때 주변 풀들이 뽑혀 나갈듯이 출렁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간단히 아몬드와 호두를 먹고 장터목으로 출발했다. 물길으러 내려갈때 아이젠을 하지 않아서 고생했는데 어제 반야봉에서 귤을 주신 분이 올라올때 물병을 들어다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점심 겸 저녁으로 즉석 북어국에 햇반을 말아먹고 자리를 배정받아 침낭을 깔았다. 책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처음 만난 분들하고 얘기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족단위로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온 팀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추울 것 같았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았다. 해가지고 바람 소리가 무섭게 났다.

<4일>
오늘은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옷을 잔뜩 입고 추리닝바지위에 아빠의 고어텍스 비옷바지와 스패츠까지 했다. 해드램프를 하고 갑자기 불이 나가도 찾을 수 있도록 여분의 배터리 위치를 확인하고 천왕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드램프가 작아서 잘 보일까 걱정했었는데 그럭저럭 올라갈만했다. 천왕봉에 오르자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비옷 자켓을 꺼내 입고 장갑을 두겹으로 끼자 별로 춥지 않고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마침내 해가 떴다. tv방송 시작 시간에 애국가가 나올때 나오는 해같은 그런 해였다. 사진을 열심히 찍고 천왕봉 비석에서도 사진을 찍고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내려올 때는 대원사로 내려오기로 했다. 시간도 많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리산에 있고 싶기도 해서 긴 코스를 택했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중봉, 써리봉까지 지난 3박 4일간 가장 아름다운 새하얀 눈길이 펼쳐졌다. 사람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적어 눈이 덜 밟혔기 때문에 발이 쑥 들어가는 곳도 있고 엉덩이 썰매도 탔다.
치밭목 산장에서 간단히 행동식과 코코아로 점심을 먹고 계속 하산했다. 둘째날부터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행을 함께 한 남학생 2명이 대원사 코스를 택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길로 갔는지 몇시간째 아무도 못 만나기도 했다. 피로가 누적되어서 인지 가장 힘든 길인것 같았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돌길이어서 발이 쉽게 피로해졌다. 허리 벨트의 버클이 부서져 고정이 안되어서 배낭이 착 안기는 느낌이 없었다. 쉬면서 건포도를 한움큼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서 인지 갑자기 에너지가 솟구치다가도 이내 다시 피곤해서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유평리로 내려오자 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매표소까지도 결코 짧지 않은 길이었다. 1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다. 매표소에 도착해 진주행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로 버스를 타고 왔다.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 느꼈는지 되새겨 보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착실하게 준비하면 처음에는 버겁게 여겨지는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는데 지레 못 한다고 체념할 필요 없는 것이다. 또 우리땅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산에서본 해, 달, 별은 모두 아름다웠고 바람따라 휘어진 나무들 깎여나간 바위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강해지겠다고 다짐하였다.

이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지리산에 있는 동안 좋은 날씨만 계속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또 산에서 도움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도움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