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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마음보다 먼저 길들여지는 몸

제3절 길 안내 하겠다며 앞장서는 진돗개 형제

3월 14일(토, 5일 차) 위태 - 하동호 - 삼화실
 

어제 내렸던 비는 말끔히 그쳤다. 언덕바지 민박에서 내려다보는 상촌

(위태)마을이 깨끗하다. 지구는 간혹 이렇게 물청소가 필요하다. 다만 기

온은 많이 떨어졌다. 저 멀리 높은 산꼭대기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민박 안방에서 아침상을 물리고 혼자 앉아 (다른 친구들은 장이 튼튼하

지 않아 아침 식사 후 순서대로 화장실을 간다. 힘들 텐데.) 커피를 마시

는데 아주머니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저 녀석들 오늘도 따라 나설 모양이네요?”

“네? 누구 이야기하십니까?”

“정돌이요.”

“누군데요?”

“저 개들 말입니다.”

“네? 개들이 따라오면 성가십니다. 길을 잃으면 돌아올 수도 없을 텐데”

“그런 걱정은 마세요. 쟤들이 길 안내할 겁니다.”

“네? 어디까지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삼화실까지 갈 생각인데.”

“쟤들이 꼭 거기까지만 가요.”

“네. 재미있겠네요. 안내 받으려면 잘 보여야겠습니다.”

“이미 준비 끝났어요. 잘 안보이셔도 됩니다.”

방에 와서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니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다가,

L 왈 “그래서 저 녀석들이 밤에 화장실까지 쫄쫄 따라다녔구나.”

새벽에 출발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저 녀석

입장에서는 늘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안내를 받았던 여행자들 중에는 육

포나 애완견용 간식을 보내오는 경우도 있단다. 방에 와서는 박종원이

준비해 준 초코바, 오징어포를 주어도 먹지 않는다. 원래 안 먹는단다.

특이한 입맛이다. 한 마디 하신다. “정 예쁘면 밥이나 좀 챙겨 주세요.”

 

여장을 챙겨 배낭을 짊어지고 나서니 개들이 난리가 났다.

“이 놈아, 넌 가지 마라. 다리도 저는 놈이!”

한 마리는 가만히 보니 사람으로 치면 소위 육손이다. 오른쪽 앞발 뒤쪽

에 발가락이 하나 더 있다. 그래서 조금 절뚝거린다. 다른 집 개인데 이

집에서 기르는 정돌이의 동생이란다. 늘 그랬듯이 출발 인증 촬영을 하

고 나서는데 저 멀리서 개들이 길을 잡는다. 우리가 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개가 우리를 끌고 가는 거다. 개의 인도를 받아보기는 처음

이다. TV에서나 봤지. 뒷산 언덕을 돌아 오르막 임도에 들어서니 바닥

에 내린 서리가 보통 아니다. 계속 밑으로 줄줄 미끄러질 뿐 도저히 진

도가 나가지 않는다. 시멘트 포장도로 옆 건초를 가려 밟으며 겨우 발걸

음을 옮겼다. 여하튼 영하 5도에서 시작한 날씨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

리를 괴롭힌다.

 

이 개 두 마리는 저 멀리 앞서서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잘 논다. 잠

깐 장난기가 발동한다. 저 녀석들이 도대체 길을 알고 가는 건가? 외길

이니 그냥 가는 거 아닌가?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에서 무작정 따라가도

되는 건가? 1km 남짓 가다 보니 오대사터에 있는 백궁선원이 나오고 들

어서는 길은 둘레길이 아니라는 표시로 저 멀리 유턴 표시가 있다. 이

유턴 표시는 혼돈할 수 있는 몇몇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되돌아가라는 표

시인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 시험 한 번 해보자. 백궁선원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어제 편히 잠을 잤고, 아침이니 힘이 남아 돈다. 오후 해거름

이면 턱도 없다. 한 5분여 걸어가니 정돌이 형제가 바로 나타나더니 주

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여하튼 10~20m를 앞서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주변을 맴도는 걸 보니 뭔가 행동이 이상하다 싶어 되돌아 정상 경로로

돌아오니 이 녀석들 또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다.

 

1시간 반쯤 걸어 궁항 마을에 들어서니 늘 그렇듯이 동네 개들이 환영의

빵빠레를 울리기 시작한다. 한 녀석이 짖으면 무슨 구령이라도 떨어진

듯 일제히 짖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을 어귀 어느 집에서 뛰어나온 아주

작고 왜소한 암컷 진돗개 한 마리가 짖지도 않고 따라붙는다. 분명 흰색

이기는 한데 거의 잿빛이다. 아파트에서 귀염 받으면서 옷 입고 신발 신

고 사는 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배까지 홀쪽 들어가 갈비뼈가 앙상하

지만 앞다리, 뒷다리 근육은 선이 뚜렷하다. 사람으로 치면 흡사 이소룡

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개가 정돌이 형제랑 다정히 인사를

나눈다. 으르렁 거리지도 않는다. 이후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마을 입구부

터 시작해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귀가 따갑게 동네 개들이 짖어 대고 심

지어 풀어 둔 몇 마리는 주변에 나타나 얼쩡거리기도 하지만 이 세 놈은

짖기는 커녕 아무런 반응도 없이 본체만체 거의 귀찮다는 눈치다.

 

이 마른 암놈의 주인인 듯한 노인께서 계속 개를 부르신다. 두 마리도

만만치 않은데 또 한 마리가 따라붙는다면 성가신 일이다. 아직 상황 파

악이 덜 된 탓이기는 하지만. 스틱을 휘두르기도 하고 돌멩이도 던져 보

지만 막무가내다. 따라 오다 말겠지. ‘암놈인데 이 수놈 두 마리 난리 났

네’하고 점잖은 체면에 개들을 조롱했다. 저러다 돌아가겠지! 그런데 웬

걸 마을을 두 개나 지나도 계속 따라 오고 두 놈이랑도 잘 논다. 이제는

아예 세 마리가 한 조가 되어 저 멀리 앞서 가면서 산으로 들로 온통 휘

젓고 다닌다. 그러다 지치면 개울물 한 번 마시고. 정말 부지런한 놈들

이다.

 

하동호가 보인다. 2003년 가톨릭신자도 아니면서 산티아고 운운한다

고 타박을 주며 나를 이 길로 내몰았던 친구 안병기 가족과 함께 이민 이

별 여행 차 서울에서 출발해 담양 - 고흥 - 여수를 거쳐 지리산 대원사

를 경유하는 3박 4일 남도 여행길에 지나친 적이 있는데 12년 만이다.

지금 중부 이북에서는 40년 만의 가뭄이라는데 다녀 본 남쪽 저수지들

은 예외 없이 많은 물을 담고 있었다. 하동댐 갑문을 가로질러 위태 -

하동호 코스 종점임을 알리는 이정표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매일 밴드

를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기 산악회에서 만

들어 단체 산행 때 쓰고 다니는 모자를 이 이정표 위에 올려놓고 신경 써

서 초점을 잡아 찍었다, 밴드에 올리면 좋아하겠다 싶어서.

 

댐이 보이는 곳부터 이미 아스팔트다. 가장 싫은 길. 그늘조차 없다. 식

당이 두어 개 보이는데 비싼 메뉴들이다. 더구나 한 집은 보신탕! 길잡

이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평촌 가서 먹자. 식당 있을 거다. 그래

도 면 소재지인데.”

 

아무 의심 없이 넓은 차도를 따라 걷는데 개들이 가까이 붙는다. 이제

좀 친해진 건가? 순간 J가,

“아! 모자.”

그래 아까 밴드 보고용 사진을 찍느라 벗어 두고 왔구먼. 방법 없다.

“야 정돌이! 너 가서 모자 좀 물어 와라!”

답이 없다.

 

투덜투덜 아스팔트 오르막길을 걸어오르는 뒷모습이 처량하다. 그렇다

고 우리가 먼저 갈 정도로 의리가 없지는 않으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다. 조금 있으니 전화가 왔다. “길 잘못 들었다. 화살표가 그쪽이 아니

다. 댐 아래로 바로 내려가야 맞다.”이씨! 전세 역전, 이제 우리 둘이 패

잔병이다. 그 순간에도 개들은 바싹 붙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아 그

렇구나. 이 녀석들이 간격을 좁히고 주변에 얼쩡거리는 건 길을 잘못 들

었다는 신호구나. 발걸음을 방해하는 거다. 아침에 일부러 다른 길로 접

어들었을 때도 발에 걸릴 정도로 주변을 맴돌았다. 상상이지만 경로에

서 아주 멀어지면 짖거나 하면서 더 강한 신호를 보내지 않았을까? 참

신통한 놈들이다.

https://www.facebook.com/baggsu/posts/190634650959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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