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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한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길의 텃세

제3절 봄을 허락하지 않는 천왕봉의 눈보라

 

3월 11일(수, 2일 차) 방곡 -수철 - 성심원

밤새 바람이 거셌다. 누구는 북에서 제트기 수 십대가 남하해 저공비행

을 했다고 했지만 나는 별 기억이 없다. 나만 곤히 잤나 보다. 이 나이

의 남자 여럿이 동침하면 늘 발생하는 시비거리. 코고는 소리에 대한

가벼운 품평회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 죽는 날까지 해결되기 어려

우리라. 모두 자기는 아니고 남이 문제라 한다. 아직 첫날이라 덜 피곤

해 뒤척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나면 -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 -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낌새를 알았으리라.

 

오늘은 비교적 쉬운 코스다. 수철까지 가는 중간에 668m 고지를 하나

넘으면 제6구간이 시작되는데 쭉 평지로 처음 경험하는 난이도 「하」 구

간이다. 대신 전체 거리는 22km로 좀 길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선다. 여전히 기온이 낮아 중무장을 했다. 함양의 베이스 캠프지기 박

원장이 전화를 해 왔다. ‘고생스럽지 않느냐, 잘 잤느냐. 천왕봉이랑 노

고단이 하얗다.’며 무척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또 한 마디 빠뜨리지

않는다.

“조심해라. 안전이 최고다. 무리하지 마라.” 의사 아니랄까 봐!

‘인간아! 우리는 이미 무리하기 시작했다. 이 길을 나선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무리다.’

 

여행을 마치고 여행자 셋과 위문단이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드는 데까지

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끝내 교편을 잡고 있는 유순필은 전교

조 핵심 인사라 그 즈음 큰 이슈였던 공무원 연금 관련 시위에 참석하느

라 결국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박종원은 여행기간 동안 베

이스캠프지기의 부담을 뒤늦게 고백했는데 매일 아침 병원에 출근하면

PC에 둘레길 지도부터 켜 놓고 짬날 때마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상상

했다고 한다. 머릿속으로는 근처의 풍경도 그려보면서. 그렇다, 세상에

는 얼핏 나만 홀로 존재하는 듯 하지만 보이든 보이지 않든,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수많은 사람들의 음덕이 나를 바치고 있다.

 

상사폭포. 제법 덩치가 있다. 적지 않은 양의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지

만 얼음의 위용은 여전하다. 봄은 열심히 겨울을 밀어내는데 겨울은 아

직 신발 끈도 매지 않았다.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가니 일대가 두루 내

려다보이는 곳에 산불 감시 초소가 있고 그 목적으로는 최고의 입지다.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지리산의 동쪽 편에서 천왕봉을 바라

보는 건 처음이다. 2002년 이후 대충 열 번은 저곳에 올랐지 싶다. 작년

여름에도 지금 동행중인 L과 함께 중산리에서 올랐다. 박 원장의 말대

로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데 간혹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천왕봉과 중봉

에 쌓인 눈이 마치 태양의 흑점 폭발처럼 휘날린다. 장관이다. 전체 일

정을 통해 특히 기억에 남는 몇 장면 중 하나다.

 

주변 경관 조망도에 보니 저 능선들 오른쪽 끝에 함양독바위 표시가 있

다. 어제 벽송사에서 내려와 마을에서 보았던 안내판과 같다. 벽송사를

지나 낭떠러지를 끼고 있던 그 좁고 폐쇄된(?) 등산로가 저 곳으로 연결

되어 있다. 내 언제 저 코스에 꼭 도전하리라.

 

주변 조망이 좋은 산불 감시 초소를 지나 고동재를 거쳐 수철에 도착했

다. 제 5구간의 종점이다. 점심 때가 지나고 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식당은 없다. 작은 담배가게에서 라면은 된단다. 배추전, 막걸리 한 통,

라면 두 개로 점심을 떼운다. 나에게 배추전이라는 메뉴가 도대체 음식

같지 않은 이유는 전형적인 구황(救荒) 메뉴라는 선입견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이날 달리 적절한 메뉴가 없기도 하지만 경비절약 차원에서

라면은 두 개뿐이다. 전체 진행을 책임진 입장에서 동행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메시지다. 처음 사 먹는 점심치고는 고만고만하다. 처음 마을에

들어서서 도저히 식당 비슷한 것도 보일 기미가 없을 때는 점심을 굶어

야 하나 잠깐 긴장했다. 참 힘든 역할을 자처했다 싶었다.

논길, 밭길을 지나 국도를 걷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밑을 통과해 4차

선이나 되는 도로를 걷는다. 이 구간에서는 무려 4번이나 고속도로 밑

을 통과한다. 산청읍 어귀에 들어서니 저 멀리 둘레길 산청 지원센터가

보이지만 굳이 노선을 벗어나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제법 번화한

곳이고 교통의 요지라 번듯한 식당도 몇 개 보인다. 1시간만 참았으면

제대로 된 점심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정보가 없으니 달리 도리가 없

다. 경호강, 남강을 따라 국도를 걷는데 돌연 작은 로터리가 나타나고

화살표는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이런 상황을 맞으면 바로 스마트폰 지

도를 켠다. 그래도 분명하지 않다. 저 멀리 시가지 방향, 묘지가 드문드

문 보이는 언덕에서 한 사람이 다가온다. 차림새로 보아 같은 여행자다.

가까이 와서 보니 어제 종착지인 추모공원에서 만났던 같은 길을 걷는

그 사람이다. 반갑다. - 전체 일정 중 하루에 여행자를 한 명도 만나지

못한 날이 대부분이다. - 이 분은 우리보다 하루 먼저 인월에서 시작했

다는데 아마 그는 ‘둘레길=산길’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강을 끼고

가는 포장도로는 아예 무시하고 무작정 산을 쳐다보고 갔을 것이다. 불

행하게도 이 구간에서는 차가 다니는 널찍한 도로가 ‘둘레길’이다. 굳이

자신의 승용차로 여기저기 옮겨 가면서 혼자 걷는다는 이 분은 우리를

앞서 갔고 이날 숙소인 성심원에서 잠깐 얼굴을 보았는데 두 번에 나누

어 종주할 계획이라고 했다. 무사히 잘 마쳤는지 궁금하다. 이미 발바닥

의 온도가 상당히 올라가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센터에서 제대로 안내해 주지 않았다. 시외버스를 눈앞에서 놓쳤다.

혼자 자장면에 빼갈을 마셨다”하면서 투덜거리는 그와 함께 잘 포장된

도로를 걷기 시작한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은 흙길과는 촉감은 아

주 다르다. 차라리 돌길이 낫다. 서서히 발바닥 온도가 올라가는 느낌이

온다. 무릎 통증과 함께 가장 두려운 복병이다. 2004년 처음 지리산을

종주했을 때 화엄사로 내려가는 돌계단 길은 지독했다. 그때는 무릎이

아파 게처럼 옆으로 걸었고 발바닥은 소화기가 필요했다. 발을 물에 담

그면 마치 달군 쇠를 물에 담글 때처럼 부시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지

금은 초기 증상이다. 발바닥은 마치 일본의 나막신 게다를 신은 것처럼

감각이 무디어졌다. 맨발로 모래밭을 걷는 듯 하다. 불편하기 짝이 없

다. 걱정이다. 혹시 이 여행을 마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약간의 두

려움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강산에가 부른 나의 애창곡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

들처럼’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딱딱해지는 발바닥, 걸어 걸어가다

보면 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난 쉴 수 있겠지” 그래 나는 지금 누워 쉴 수

있는 저 넓은 꽃밭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내리교에 도착했다. 결정이 필요하다. 선녀탕을 들렀다 가면 약 4km를

돌아간다. 의견을 묻는다.

“선녀 있나?”

“보장 못한다.”

“설령 있어도 이 날씨에 목욕은 불가능하겠지.”

“아마 그렇겠지. 대표 사절이라도 보낼까?”

“그냥 가자.”

그 순간 첫날 정한 “갈 수 있는 모든 곳은 다 들러 골고루 구경하고 간

다.”라는 수칙을 “노선에서 벗어 나는 곳은 단 1m 가지 않는다.”로 수정

했다. 이 수정 수칙은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지켜졌다. 본의 아니게 내가

거리 계산을 잘못해서 대축 - 원부춘구간에서 약 4km를 더 걸은 건 별

도다.

 

논개가 왜군 장수를 껴안고 뛰어들었다는 진주 촉석루까지 쭉 이어지는

남강 남쪽 변을 걷다 보니 양지바른 곳에 홍매화가 예쁘게 피었다. 도로

변 농장에서 키우는 것으로 보이는 작고 흰 토종개 – 통상 X개 라는 표

현이 더 익숙하지만 - 한 마리가 쪼르르 다가오더니 꼬리를 흔들어 댄

다. 이 녀석도 아마 사람이 그리운가 보다.

이 책은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사진이 포함된 원고는 페이스 북 '백수라서 다행이다(
https://www.facebook.com/baggsu/posts/1876088075952412)'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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