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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조회 수 3521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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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망설이고,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던 길을 12월 초에 법계사까지 오르고, 내려 선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 길을 다시 찾아 나선다.

정리를 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알게 된다. 걷다 보면 머리로서 생각한 무수한 사고의 사치가 사라지게 됨을. 지리산을 걷을 걷은 이가 내게 들려준 어떤 말-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져서 좋다는 그 길-을 처음에는 알 수 없었으나, 책상에 앉아 있는 날이 늘어날 수록 내 어떤 초조감과 펜대를 굴리는 사고만으로 지내는 날이 축적될 수록 괜스레 머리가 아파왔다. 혼란스런 생각 모두를 지워버리고, 던져버리고 싶었다. 머리 속의 혼란스런 사고를 모두 비워비리고, 새해를 맡이 하고 싶었다. 12월이 아닌, 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부터, 내게 지리산은 하나의 '화두'였고, '정리회자'의 길이였는지 모른다.

마산을 지나 2번 국도를 따라 진주로 온 다음, 다시 3번 국도를 따라 단성으로 들어, 중산리에 이르니 아침 9시이다. 집 대문을 나설 때에는 밤하늘에 새벽별이 초롱초롱했는데, 내가 달려온 하늘에는 파란 색이 펼쳐져 있고, 마주한 하늘에는 구름이 히말라야의 어느 설산처럼 몰아쳐온다. 집에 있을 때에는 열두 번 더 나설까 고민을 했지만 지리산 아랫자락에 닿으니 당연히 가야할 산으로 다가온다.

옷을 좀 더 두껍게 입고, 배낭 하나 메고 길을 나선다. 공휴일이어서인지 많은 이들이 수근거리며 길을 나선다. 난 그네들 틈에 섞이지 않고, 묵묵히 땅을 보며 걷는다. 언제나 내가 걷는 산길은 홀로이며, 그 길 속에서 나를 마주하려 한다.

배낭을 메고 한 시간 여 올라갔나, 숨이 헉헉 차 오른다. 물 한 방울이 간절히, 간절히 그립다. 숨이 차오른다. 나는 안다. 잠시 쉬거나 물 한 모금이라면 이 고통에서 금새 헤어날 수 있음을, 하지만 깊은 갈증을 안고서 발걸음을 위로 옮긴다. 억지스레 목에 침이라도 흘려 내려보내고 싶지만 내 모든 생각의 고리는 이 차오르는 숨이 언제 넘겨지는가에 메달려 있다. 한 발, 두 발, 숨이 차오름은 서서히, 그리고 그 절정은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예전에 한 달에 두 서 너번 산에 오를 때에는 이 숨 차오름이 끝나면 평정심을 얻는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오래도록 책상에 앉아 있었고, 방에 누워서 시간 만 보냈다. 갈증을 참아야 하나, 아니면 물 한 모금으로 숨을 돌려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저울질을 한다.

'걷자, 걷자, 내 기억 저 너머에는 분명 평정심을 만난 순간이 잊져지지 않고 잇다. 이 숨 차오르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어찌 사회에서 나를 이겨내겠는가' 어쩌면 나는 내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갈증이 가셨나 싶었더니, 눈가루가 흰쌀가루처럼 계곡에 흩날린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눈이 온다고 메모하려고 하니, 눈가루가 내 배낭 위에도 내려 앉아 있다. 친구가 건내오는 '귀환하라'는 메세지를 지워버리고, 알맞게 얼은 얼음골 사과를 한 잎 베어문다. 늦은 아침 한 조각이다.

눈가루가 흰쌀가루 마냥 힘차게 흩날리고, 계곡 저편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나를 두렵게 한다. 목의 갈증이 가겼나 싶었더니, 이제는 귀에 메아리치는 바람소리가 심히 걱정스럽다. 바람 소리에 천왕봉이 닫혀지지 않을까, 닫혀지면 난 괜찮은가, 지리산을 걷는 의미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해 본다. 바람 소리가 범의 호령보다 더 무섭게 울려올 때 마다, 난 천왕봉을 생각한다.

로터리 산장까지 오르니, -앞서 말한 두 번째 길이지만, 난 아니 걸어온 듯 처음 느낌으로 걷고 있었음을 알았고, 걷는 내내 나는 머리가 텅 비어 있음을 알았다. 문득 문득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되는 '물아일체'의 순간이 아니었나 되새겨 본다.

법계사 아래에서 눈을 꾹꾹 눌러 담고, 나뭇잎 하나를 띄워 바가지에 샘물을 받아 목을 축인다. 중산리에서 산 초콜렛과 물 한 병은 배낭 안에 그대로이다. 물이 들어가니 허기가 차 오른다.

중산리, 법계사를 지나, 이제부터는 많이 낯설은 길이다. 종전까지는 다녀온 길이라면, 앞길은 오래 전에 다녀와서 가물가물하며, 그 흔적을 쫓기에는 눈바람이 너무 매섭게 나를 집어 삼키고 있다. 난 얼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옷매무새를 더욱 조인다.  커다란 바위를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 눈꽃을 보며 좋다고 올라가는 순가, 다시 바람이다. 계곡에서 몰려오는 바람은 나를 두렵게 만든다. 그 울음소리가 '내려가라' 하는 듯 하다. 난 조금씩 조금씩 한발을 내딛고 있다.

귀를 잘라 놓을 듯 휘몰아치는 바람이 잠시 멎자, 설화(雪花)가 핀 소나무 한 그루가 낙낙장송인냥 홀로 서 있다. 천왕봉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숨겼다는 순간적으로 반복한다. 난 소나무의 뒷편 절벽에 핀 눈꽃나무를 바라본다. 나무가 자라는게 그냥 서 있는건 줄 알았지 오늘처럼 이토록 모진 바람 속에서 서 있는건 줄 미처 몰랐다. 내가 그를 보는 시간이 얼마만큼 일까, 그가 바람을 맞고 하루하루를 보내며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만큼일까. 난 이제서야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본 듯 하다. 이 모진 겨울 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낟. 그리고 나를 잠시 생각한다. 뜻하지 않는 자리에서. -난 지라산의 눈꽃을 생각했지. 모진 바람 속에 홀로 서서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는 생각도 못했다. 소나무를 통해 나를 키워야 한다. 소나무가 무척이나 커 보인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 위에는 많은 이들이 있다. 산에 오래도록 다닌 사람일 수록 장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몇 몇 학생은 운동복에 운동화 차림이다. 당연히 아이젠이며, 배낭을 메고 있지 않는 게 많이 불안해 보인다. 겨울산은 절대 자만 해서도 안되고, 무모해서도 아니된다.

저 아래부터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 바람은, 천왕봉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날려 버릴 기세로 몰아쳐 온다. 어디 등을 숨길 곳이 없고, 손끝에서 굳어져 오는 증상은 동상을 예곡하고 있다. 난 어떠한 뜸도 들이지 않고, 모진 바람을 맞아가며 서둘러 장터목으로 발길을 돌린다. 함양에서 달려오는 바람이 매섭다. 바람과 찬기온, 냉기가 손끝에서 굳어가는 느낌이다. 난 무엇에 쫓기 듯, 장터목 산장으로 허급지급 내려선다. 고사목을 지나 내려오니, 눈이 발목까지 쌓여있고, 장터목에 이르니 많은 이들이 보인다.

내가 가지 않은 어떠한 길은 모두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내 발걸음에 달려있다. 허급지급 장터목에 내려서니, 누군가가 기념 사진을 좀 찍어 달라고 하는데, '손가락이 얼었다'하며 실례를 하고서는 다시 중산리로 내려간다. 손을 호호 불며, 입김을 쏘인게 큰 도움이 되었는지 손이 조금 풀려온다. 장터목에는 냄비가 펄펄 끓고, 난 추위와 바람과 허기를 안고 내려간다.

중산리에서 법계사까지 숨이 차오르며, 머리가 텅빈 오르는 길이라면, 법계사부터 천왕봉까지는 동장군이 내 손 끝부터 나를 달라붙어 오는 길이였고, 장터목부터서는 마음이 여유를 조금 찾는 길이다. 우선은 마냥 높아 만 보이던 그 길을 지나왔다는 것이 대견하고, 그 바람이 과연 불었나 싶은 생각도 스친다.

산을 내려오면서, 수 없이 비우기를 반복한다. 1여 년이 다가고, 난 큰 탈 없이 한 해를 보냈으며, 큰 고마음을 안고 살아왔다.

내 지나한 삶을 돌아봄에 후회는 없다. 그리운 것은 지난 시절의 낯설 길이며, 아쉬운 것은 그 낯선 거리에서 내 욕심이 무척이나 부풀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해에는 좀 더 나를 비우고, 나눔을 습관인 냥 길들이고 싶다. 됐다. 이제 됐다.

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지난 늦가을부터 나에게 약속한 그 길을 홀로 걸었다. 이제 됐다. 가득찼던 잡생각이 비워지니, 독한 소주가 떠오른다. 아니 목이 차오르는 순간부터 소주는 함께 따라왔었다. 돼지국밥에 소주 한잔이 무척이나 떠오른다.





지리산께서 길을 내어 주시어, 잠시 그 길을 다녀왔습니다.  12월 25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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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eon 2008.12.27 15:05
    진지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멋진 산행기 입니다. .
    오랫만에 마음 차분해지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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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만한 물가 2008.12.27 21:14
    참 겸손해지는 산행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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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터목 2009.01.02 06:33
    많은 생각을 하게끔하는 좋은 산행기입니다. 덕분에 함께 차분해지고 함께 복잡한 생각을 지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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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 2009.01.08 01:12
    나를 비우고 나눔을 실천하실 풍경님의
    새해에 더욱 하얀빛으로 빛나시기를 바란답니다
    감사드립니다~~풍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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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ramkim 2009.02.02 04:33
    참 멋진 산행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산행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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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igol1 2011.07.03 10:51
    글을 참 재밋게 썼네요
    많이느끼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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