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9.12.21 13:28

벽소월야(1)

조회 수 2307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벽소월야

B형!
오랜만에 벽소월야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 옛날 하늘과 맞닿은 그 산정에서 밤새 쏟아져 내리던 은하수와 새벽을 아쉬워하던 별똥별이 길다란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던 그 밤이 생각났습니다.

매 주 가는 지리산인데도 문득문득 옛 산행이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도 꽤 많은 세월을 먹고 살아왔다는 증거겠지요. 추억을 곱씹을수록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왜 갑자기 그 달이 생각났을까요? 젊은 시절 불안한 미래에 대한 탈출구도 아니요, 번잡한 도시를 떠난 홀가분함도 아닌 듯 합니다. 그러기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그 밤의 적요였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높은 산정에 둘 밖에 없기도 했지만, 그날 밤은 우리 등을 어루만지던 달빛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풍요로웠었지요. 그런 밤이 그리웠었나 봅니다.

오름길은 비린내골을 택했습니다. 오찬 후 오르기 시작했으니 시간 하나만큼은 넉넉했습니다. 덕분에 아웅거리며 제 갈길 찾아가는 물소리를 벗 삼아 쉬엄쉬엄 오르기만 그만이지요.

너른 함지박은 그대로였습니다. 흐르는 물이 아무리 빈약해도 저 푸른 하늘을 담아낼 만큼은 충분했습니다.

사람 하나 찾는 이 없는 이 깊은 산중에서 아무런 욕심 없이도 저렇게 하나 가득 하늘을 담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을 밟고 올라 높이 서있기보다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아도 남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아니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마음까지도 모두 담아 녹여 낼 수 있는 그런 그릇을 가지고 싶습니다.

우리 같은 속인들이 사는 세상사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잘하는 듯하지만 남에게는 항상 부족하고, 주는 듯하지만 오히려 더 받으려는 심사가 가슴 한 곳에 자리하고, 위하는 듯 하다가도 툭 던져버린 말 한마디에 속상하고, 후회하고...

그런데 저 함지박은 그렇지 않습니다. 담을 수 있는 만큼만 담아 놓고 흘려보내지요,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한 배려가 먼저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진 자 만이 즐길 수 있는 행복아닐까요?


B형

벌써 폭포가 코 앞에 있습니다. 마음이 한가로우니 시간도 절로 가는 듯 합니다.

폭포는 실타래 같은 물줄기가 흘러 내리고 있지만 곧추 서있는 모양새와 주변 풍광이 분위기를 압도하여 오금이 저리기도 하는 곳 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물길도 크지 않아 그나마 있던 인적도 스멀스멀 사라집니다.

폭포 위쪽이 두물머리 여서 선택을 강요하는데다가, 올라온 시간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고도상으로 얼마 남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게 되고, 마음은 이미 저 위쪽 널찍한 군사도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길을 버리면 너덜강과 산죽사이를 술래잡기하듯 올라야 합니다. 길다운 길은 없지만 그래도 선답자의 흔적을 쫒는 게 조금이라도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요.

이데올로기 산물인 군사도로에 올라서 먼지를 털어내고는 벽소봉으로 올랐습니다. 처음 길은 양호한 편이었지만 다시 한번 만나는 군사도로에서 내쳐 오르는 길은 거의 묵어 있었습니다.

배낭을 붙드는 가지를 밀쳐내 보지만 대적해야할 대상이 너무 많아 자연 허리를 낮추게 됩니다. 중베낭에 허리를 굽히고 경사를 오른다는 것은 중노동이나 다름없지요.

발걸음은 자연스레 바위 쪽으로 붙게 됩니다. 나뭇가지 하나라도 피해보려는 심사지만 그쪽이라고 그리 만만하겠습니까? 여기서는 요령 필요 없습니다. 그냥 우직하게 무소의 뿔처럼 밀고 나가는 게 상책입니다.

마루금에 올라섰습니다. 이제는 잠자리만 찾으면 되지 싶어 배낭을 벗고 전망 좋은 바위로 올라 서 봅니다. 그러나 시계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세월동안 주인도 없이 훌쩍 자라버린 나무들이 시야를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좌측 날등으로 올라서 봅니다. 잠시 후 바위 모퉁이를 돌아 그 정점에 올라서 보지만 벽소봉은 예전의 그 벽소봉이 아니었습니다.

전망좋은 그 자태는 자취를 감추고 나무가 성기게 쩔어 있는데다가 절벽만이 그 높이를 짐작케 하고 있어 예전의 그 포근한 느낌은 커녕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되돌아 나오면서도 하룻밤 뉘일 곳을 찾아보지만 내 족적을 옮기는 폭마저도 산죽이 자리를 차지하여 변절한 애인이라도 뿌리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 바위틈의 그 석간수만이 그대로였습니다. 퇴각하는 페잔병처럼 산장으로 왔습니다.

어스름 땅거미가 내렸는지라 마당은 벌써 잠자리 다툼이 일고 있었고, 오늘 목적지까지 임무를 완수한 사람들은 시골장터 주막에 모인 사람들처럼 왁자지껄하여 그곳도 내 쉴 자리는 아닌 듯 싶었습니다. (계속)


- 구름모자 -

  • ?
    moveon 2009.12.21 17:52
    2편도 기다리겠습니다.
  • ?
    쉴만한 물가 2009.12.22 19:47
    넉넉하신 마음입니다. 지리를 닮으신 마음이시겠지요.
  • ?
    이게아닌데 2009.12.22 21:12
    하여, 그날밤 벽소 큰달님과 정담을 나누며 고생한 다리를 쉴수 있게
    허락 받으신 자리는 어디 였을까요?
    2편에 나오나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지리산 산행기, 느낌글, 답사글을 올려주세요. 운영자 2002.05.22 10004
1102 지리, 녹음속으로,,,, 6 슬기난 2012.06.02 1374
1101 천상화원 유람기(2012) 3 슬기난 2012.05.20 1361
1100 긴 동면, 그리고 지리산!(장당골~순두류) 5 슬기난 2012.04.02 1817
1099 드디어 지리산에 서식하다.... ㅎㅎ 3 곽서방처 2012.02.22 1426
1098 한신 지곡 우골 -멋진 비경을 찾아서,,,, 5 슬기난 2011.11.22 1686
1097 바람에 눕다! 8 슬기난 2011.09.21 1808
1096 유두류록의 발자취를 따라서,,, 2 슬기난 2011.08.31 1810
1095 일곱선녀의 심술과 함께 한 우중 산행! 4 슬기난 2011.07.30 1959
1094 오월처럼 풋풋한 사랑으로 마주하며 살고 싶다!(거림-촛대봉) 7 슬기난 2011.06.17 2358
1093 초보 '몰래산꾼'의 종주기행 6 청솔지기 2011.06.08 2152
1092 달뜨기 능선 진달래는 저리 붉게 피어나고,,, 8 슬기난 2011.04.30 1851
1091 2011(신묘년) 지리산 시산제 산행! 8 슬기난 2011.02.02 2261
1090 지리산 둘레길 3 이게아닌데 2010.10.02 3649
1089 얼음은 풀려도 쐐기는 박혀있다(얼음쐐기골) - 2 3 구름모자 2010.09.16 2707
1088 얼음은 풀려도 쐐기는 박혀있다(얼음쐐기골) - 1 6 구름모자 2010.08.23 2891
1087 올해도 지리산에~ 2 김재신 2010.08.22 1707
1086 험하고도 힘들었던 백무동계곡에서의 아름다운 동행 4 file 거북 2010.06.03 3292
1085 서북능의 꽃, 바래봉 3 이게아닌데 2010.05.30 2047
1084 지리산 묘향대 6 이게아닌데 2010.05.16 3426
1083 바래봉 연서 4 카오스 2010.05.16 188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9 Next
/ 5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