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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1절과 2절이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연재10>
제3장 마음보다 먼저 길들여지는 몸
제1절 빗속에서 몸도 마음도 차츰 길에 적응해가고

 

3월 13일(금, 4일 차) 운리 - 덕산 - 위태
토종 장닭 백숙 한 마리에, 맛있는 수제(手製) 막걸리에, 찜질방 수준의
뜨끈한 방! 오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덕
산까지는 난이도 등급은 「상」이다. 일단 목표는 중태까지. 아침에 일행
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외가 중시조(中始祖)이신 조식 선생의 유적지를
좀 둘러볼 시간을 갖겠다고. 4년 전 곧 여든이 되시는 모친과 이모님을
모시고 두 분의 고향인 내원사 입구와 성장기를 보내신 진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곳 덕산을 경유했지만 시간에 쫓겨 차에서 내리지도 못
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였다. 여하튼 나의 반
쪽에는 조(曺)씨의 피가 흐른다.

 

평이하다. 산속의 길은 원래 나무를 운반하는 운재로(運材路)였다는데
경사는 있지만 넓은 흙길이 아주 호젓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째 유
실물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키가 작은 산죽밭이 있어 포즈를 잡고 사진
을 찍고 했는데 한참을 걷다 L이 고글이 없단다. 일동 뒤로 돌아 걷기 시
작했지만 어디까지 확인해야 할지 답이 없다. 늘 선두에 선 친구였는데
뒤를 쫓아가던 우리 눈에도 뜨이지 않았다. 전 일정 동안 잃어버린 두
개의 유실물 중 하나다. 다른 유실물은 구례 신촌 민박에 버려두고 온
근육 이완용 테이프. 하산 후 한 달이 지나 여행자들과 위문단들이 함께
해단식을 했는데 고글이 없길래 새로 장만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기념이
라 1년은 없이 산단다. 별난 놈!

 

백운 계곡, 마근담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니 빈 곳 없이 감나무가 온 동
네를 덮고 있고 사람들은 감나무 가지치기에 분주하다. 아주 심한 경우
는 도대체 저 곳의 감은 어떻게 따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급경사지에
도 여지없이 감나무는 서 있고 곶감 말리는 시설은 어디서나 볼 수 있
다. 이런 모습은 이 구간 종점인 덕산(운리)을 지나 다음 구간 중간쯤인
중태까지 계속되고 덕산을 조금 지나면 곶감 전용 경매장이 있으니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곶감이 생산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천면 소
재지인 덕산에 들어서니 여행 시작 후 가장 번화한 시가지가 펼쳐진다.
점심 메뉴를 고를 수 있다는 건 대단히 고무적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메
뉴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미리 민박에 전화를 해도 밥만은 준비해 주기
곤란하다는 답을 듣기 일쑤였다.

 

L의 아들은 지금 지역 예비 사단에서 신병 훈련을 받고 있다. 허리가 좋
지 않아 훈련을 마치고 공익요원으로 일할 근무처까지 이미 정해져 있
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요즘은 편지마저도 훈련소 홈페이
지에 올려두면 출력해 전달하는 세상인데 이 친구 인터넷을 편히 이용
할 수 없는 환경이 마음에 걸리는지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편지 보낼 방
법을 물었다. 더구나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는 날까지 이 여행을 끝낼 수
없으니 고생한 아들의 등을 두들겨 줄 기회도 없다. 요즘은 훈련소에서
도 전화를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작년 11월 제대한 아들을 둔 내가
귀띔해주니 그때부터 휴대전화 배터리 상태에 아주 예민하다. 성심원
안내센터에서 둘레길 기념엽서 3장을 미리 챙겨 두었는데 이곳에 오니
대로변에 덩그러니 우체국이 보인다. 30분 줄 테니 후딱 서너 줄 써서
보내고 오라 했다. 그 사이 이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집 찾아 두겠다고.
외아들에게 엽서 한 장 써 보내고 나타나는 그의 얼굴은 아들 전화를 받
았던 두 번을 포함해 가장 화사한 모습이었다. 하동호에서 삼화실로 가
는 6일 차, 평촌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나 아들의 전
화를 받았다. 그때 이 친구의 활짝 핀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데 결국 그 아들은 퇴소한 당일 전화도 없었다. 무심한 놈! 실은 내 아들
놈도 다를 바 없고 아마 우리도 그런 아들이었으리라. 이게 사람 사는
이치이다. B.C.2000년에 만들어진 수메르의 점토판를 비롯해서 수도
없는 곳에 밝혀 두고 있지 않더냐. “요즘 젊은 것들 문제다.”라고.

 

타지 특히 시골에서 맛있는 식당을 찾는 방법은 토박이들 특히 공무원
들이 많이 가는 곳을 찾으면 된다. 관공서들은 대부분 모여 있고 또 시
골에서는 그곳이 중심가이기도 하다. 둘이 흩어져 대여섯 곳을 탐문하
던 중 경찰 4명이 동행들과 함께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나오는 집을 보
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들어갔다. 아주 훌륭한 김치찌개에 막걸리 두 통
을 비우고 나오는데 어제부터 예고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 맞는
비다. 우리나라에서 3월에 2주 동안 한 번도 비를 맞지 않는 것은 불가
능에 가깝다. 아니 어느 계절인들 2주 동안 비를 완전히 피할 수 있으
랴? 지금 중부 이북은 기록적인 가뭄이라는데. 적은 양의 비가 내릴 경
우를 대비해 우산도 마련했고 따로 비옷도 챙겼다. 빗방울은 가늘지만
아무도 우산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비옷에 배낭 커버를 챙겼다. - 그
우산은 1g 줄이기 조치의 처단 대상 1호였다.

 

J는 금년 초 한라산 등반 때 준비했다면서 배낭까지 통으로 감쌀 수 있
는 품이 넉넉한 우의를 입는다. 군에서 쓰는 판초 같은 형태다. 최고다.
L은 배낭 일체형 배낭 방수커버에 비옷까지 입는다. 나는 분리형 배낭
방수커버와 비옷. 그런데 이 방수커버는 2004년 지리산 첫 종주 때 준
비한 것인데 - 실은 거의 등산 초보인 친구가 산 거다. - 작다. 비옷은
이번 여행을 위해 슈퍼에서 개당 천 원짜리를 두 개 준비했다. 배낭 커버
도 감쌌다기보다는 대충 묶어서 덮고 길을 재촉한다. 내 장비가 제일 부
실하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아침에 합의했던 중태가 아닌 5km
더 먼 다음 제9 구간 종점 위태까지 가기로 의기투합하고 숙소도 예약했
다. 아마 어제 그리 많이 걷지도 않았고 - 전체 일정 중 마지막 날을 제
외하고는 가장 짧은 거리를 걸은 날이다. 단, 마지막 날은 오후 1시에 마
쳤다.- 전날 잠자리도 음식도 아주 좋았기 때문이리라. 결정적으로 나
흘쯤 되니 이제 몸이 조금씩 탄력이 붙는다는 느낌이다. 몸은 알아서 적
응한다. 실크로드를 걸었던 올리비에는 그랬다. ‘당신의 몸이 훈련된 육
상선수처럼 적응할테니까. 실크로드를 걷기 시작한 지 13일째 되던 날
내 몸의 근육들은 걷기에 완벽하게 적응했어.’ 이 기준이라면 우리는 「완
벽하게 적응」할 때쯤 마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결정이 우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행운의 단초가 되리라고 그
때는 아무도 몰랐다. 이후로는 당일 계획을 변경한 경우는 없다.

 

덕천강변을 따라 걷는데 바람이 차다. 군 생활을 제대로 한 사람이면 누
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으리라. 우의를 입고 땀을 흘릴 때의 그 기분. 한
여름이 아니면 노출 부위는 추위를 느끼고 우의 안은 찜통이다. 벗으면
비를 맞은 온 몸은 차가워진다. 벗지도 입지도 못하는 그 괴로움. 애초
오늘 머물기로 했던 중태에 접어드니 둘레길 안내소가 나온다. 잠깐 비
도 피할 겸 여권에 스탬프도 찍을 겸 들어서니 어제 산청 센터에서 여권
을 발급해 주신 분이 근무 중이다. 센터를 옮겨 가면서 근무한단다. 반
갑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는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잠깐 목
표 지점을 연장한 것이 옳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3시간여
를 걸어 3일 만에 경남 함양, 산청군을 벗어나 하동군에 접어들었다. 이
제 구례, 남원만 지나면 끝이다. 말은 쉽다!

 

특이할 것 없는 길을 가던 중 L이 묻는다.
“오늘 무슨 요일이고?”
“금요일.”
“내일 토요일인가?”
“보통 금요일 다음 날을 토요일이라 한다.”
“주말에 누가 면회 오나? 아니면 반공일(伴空日)인데 내일은 반만 걷
나?”
“지럴. 우리가 지금 군에 있나 아니면 교도소에 있나? 면회는 무슨 놈의
면회!”
“그래도 기다려지네. 인주는 온다더나?”
“아직 연락없다. 그리고 이게 무슨 월급 받고 하는 일이야, 요일 따지
게?”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그렇게 우리는 이미 아주 단순한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징느 이곳을 참조해 주십시오. 

https://www.facebook.com/baggsu/posts/1897736877120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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