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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길의 텃세

제4절 걸어보면 안다, 땀 냄새 따위와 바꿀 수 없는 등짐의 무게

 

오늘 숙소는 성심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둘레길의 관리를 맡고 있

는 사단법인 「숲길」이 직접 운영하는 유일한 게스트하우스 ‘쉬는 발걸음’

이다. 성심원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 자활 시설이다. 게스

트하우스는 위치로 보아 이 성심원에서 최소한 부지는 제공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건물도 제공했을지 모른다. 상당히 규모 있는 숙박 시설

인데 식권을 구입하면 성심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 같은 건물에

지리산 둘레길 산청 센터가 있다. 센터에는 몇 종류의 유인물과 기념품

들도 있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종주증서를 발급해 준다 길래 1인당 1만

원씩의 거금 - 하루 총 예산의 1/3이다. - 을 지불하고 둘레길 여권(?)

을 발급받고 첫 스탬프를 찍었다.

 

2층 건물인 게스트하우스에는 남녀 따로 쓰는 -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가? - 공동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고 샤워장에는 빨래를 할 수 있는 간

단한 도구들도 있다. 남성용 샤워장은 2층, 화장실은 1층, 여자는 거꾸

로다.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2층인데 화장실을 쓰기 위해 한 층을 내려

가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투숙객은 우리가 전부. 2층 화장실을 깨끗하

게 쓰는 조건으로 양해를 받았다. 오늘은 걷기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날. 원래 계획이 ‘이틀에 한 번은 속옷을 빨아 입는다’였다. 세탁기를 쓸

수 있느냐고 물으니 탈수만 가능하단다. 찬물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

래판을 이용해 빨래를 했다. 83년 논산 훈련소 이후 32년만이다. 샤워

장도 거의 그 훈련소 수준이다. 물이 닿지 않는 피부는 춥다. 남들이 쓰

다 버리고 간 비누와 샴푸로 대충 씻었다. 왠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작년 2박 3일 지리산을 종주했을 때의 일이다.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유심히 본 직장 후배가 물었다, ‘같은 옷을 여러 벌 가지고 다녔냐고.’ 시

작부터 끝까지 같은 옷이라 했더니 그 무더운 여름날 등산 중에 땀도 많

이 흘렸을 텐데 가능하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차피 그 옷 갈아입

어 봤자 빨 수도 없고, 배낭에 넣어 두면 확실히 발효될 거고 또 딱히 차

림새로 점수 딸 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땀 냄새와 배낭 무게를 교

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너도 그 정도 걸어 봐라.’

 

태백산맥을 76일간 혼자 걸어갔던 남난희에게는 1주일마다 보급대가 찾

아 와서 식량, 기름(취사용), 구급약 등 필요한 물건을 보충해 주고 옷도

교환해 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옷을 몇 벌씩 교환해 주었는지에 대해 그

의 책에는 설명이 없고 또 여성이라 구체적으로 상상할 의사도 없다. 다만

지원대들은 바꾸어 줄 새 옷을 들고, 지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입고

왔단다. 남난희가 지난 1주일간 입던 옷과 맞바꾸어 입고 돌아갔다는 뜻

인데 남난희가 가장 미안한 부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왜 그랬는지는

잘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아마 그 역할은 여자의 몫이었지 싶다.

 

제법 일찍 도착했으니 오늘은 밤이 길다. 걸어 오면서 이미 가게가 있을

만한 마을은 최소 한 시간 거리 밖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베이스캠프

지기 박 원장에게 전화를 건다. 이 친구는 집이 진주라 매일 함양으로

출퇴근한다. 성심원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 접해 있어 퇴근길에 별

어려움 없이 들렀다 갈 수 있어 한마디로 막걸리 좀 공수해 주고 가라고

공갈 반 애걸 반. 파는 곳도 없고 이 긴 밤 수컷 셋이서 다른 낙(樂)도 없

다고 했다. 그랬더니 함양에서 긴한 약속이 있어 그날 진주로 안 가고

함양에서 잔다면서 아주 안타까워한다. 내가 미안할 정도다. 혹시나 해

서, 아주 조심스럽게 게스트하우스 근무자에게 물으니 매점에 막걸리

를 판단다. 왜 이 곳에는 당연히 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고정관

념이 안정감을 제공할지는 몰라도 진취적 사고를 막는 데는 그런 원흉

도 없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오는 길에 매점에서 4통을 샀는데

매점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따로 보관하고 있던 손수 담그

신 김장도 좀 챙겨 주신다. 횡재했다. – 이 이야기는 오늘 이 순간까지

도 박원장에게는 비밀이다.

 

가톨릭은 비교적 음주나 흡연에 관대한 문화라서 그렇다지만 이런 종교

요양시설에서 술을 판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작년 8월 지리산

어느 산장에서 근무자가 ‘자가소비용’으로 보관 중인 소주 몇 팩을 뺏어

먹는 전대미문의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기억이 떠올랐다. - 정말 재미

있는 구체적인 정황을 여기에서 소개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지

만 여러분들의 안녕을 위해 참고 넘어간다. 규칙상 방에서는 취식을 할

수 없고 게스트하우스 1층 공용 식당에서 먹어야 한다기에 근무자도 초

대해서 한 잔 권하고 남은 코스에 대해 안내를 받는다.

 

“내일은 좀 힘들 겁니다.”

“우리 벽송사도 거쳤고 오늘 산불 초소도 넘었습니다.”

“그래도 각오를 좀 하셔야…”

“네! 알았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 대답이 얼마나 가소롭게 들렸을지

알게 되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은

민박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운리(14km)에서 자거나 아니면 덕산까지

가야 하는데 덕산(27.3km)은 너무 멀지 않겠냐고 한다. 권고를 받아들

여 운리에 있는 민박을 소개 받았다.

 

순식간에 4통의 막걸리는 사라지고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순간 내 등 뒤

에 있는 김치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고 혹시나 해서 열어 보니 세상에 막

걸리가 4통이나 방긋이 웃고 있다. 갚으면 되지 까짓것. 다 털어 마셨다.

 

2일 차 밤. 우리는 우리만의 여행 규칙을 정했다.

1. 목적은 있으되 목표는 없다. 2. 끝까지 간다.

3. 세 명이 끝까지 간다. 4. 단 1m도 건너뛰지 않는다.

5. 수염을 깎지 않는다. 이 규칙은 마지막 순간까지 잘 지켜졌다.

이 책은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사진이 포함된 원고는 페이스 북 '백수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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