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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길의 텃세

 제1절 이 길이 맞나? 첫말부터 삼킨 선입견의 매운 맛

 

* 사진을 올리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네요. 연습해서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페이스 북 "백수라서 다행이다"에서는 책에 수록된 사진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3월 10일(화, 1일 차) 금계-동강-방곡

2015년 3월 10일 07시. 전국 한파 주의보. 기온은 영하 5도. 춥다. 대충

씻고 여관을 나선다. 어차피 걸어야 할 길, 방향만 보고 걸어서 시외버

스 터미널로 간다. 고향으로 오며 가며, 또 지리산을 오며 가며 친구 박

원장을 찾아 수차례 들른 동네라 대충 동서남북은 가린다.

 

읍 소재지 정도에서 아침밥을 파는 식당은 그리 많지 않다. 돼지국밥!

별 저항 없이 합의. 그런데 맛이 별로다. 혹시 점심을 사 먹을 수 없는 경

우에 대비해 준비한 플라스틱 그릇에 따로 점심 때 라면국물에 말아 먹

을 밥과 김치 좀 담아 달라고 하니 야속하게 김치값까지 쳐서 받는다.

야박한 인심이다. 아직도 시골 인심이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그릇을 준비하는 것에서부

터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이런 의견의 차이는 때로는 확연하게 모

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바닥에 몸을 감추기도 했지만 세 사람이

14일을 같이 보내는 동안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까지는 약간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무게에 민감했던 L은 애초부터 비닐 봉지를 주장했다. 밥도 김치도. 결

국 이 그릇에 밥과 김치가 담긴 것은 이때가 마지막인데 정작 문제는 버

너도 코펠도 그리고 이 밥 그릇, 김치 그릇도 아닌 가스통이었다. 버너,

코펠, 그릇 2개를 다 합쳐도 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 두 번 사용하고 남은

가스통 무게 만큼이 못 된다. 그 가스통은 내가 준비했고 여행을 마칠

때까지 나의 배낭에 들어 있다가 결국 서울까지 되가져왔다. 아마 지난

여름 지리산 종주 때 준비했던 거지 싶다. 다음에 또 써야지. 이 집착!

 

함양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이 도보 여행의 출발지이자 지리산

둘레길 제 4구간의 출발점인 금계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15분을 기다려야 했다. 택시 찾아라. 3명의 버스요금 11,500원, 택시비

는 2만원. 굳이 택시를 탔다. 책정한 하루 예산이 9만원임을 감안하면

작지 않은 추가 지출이다. 마음이 급하다. 아니 나로서는 긴장을 요구하

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날씨는 차고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만 할 뿐

이다. 우리가 오늘 걸어갈 구간을 포함해 서너 구간을 걸었을 뿐만 아니

라 자전거 여행 관련 국내 최고 블로거인 양재심 선배가 그랬다. “매일

청계산(615m) 정도 넘으면 된다”고. 다녀와서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계

산해 보니 청계산이 아니라 최소 북한산(837m)은 넘어야 한다.

 

금계. 지리산둘레길 제 4구간인 금계-동강 구간부터 시작한다. 「숲길」

에서 운영하는 지리산 둘레길 함양군 안내 센터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

지 굳게 잠겨 있고 당장 첫 날, 첫 코스부터 선택을 해야 하는데 서암정

사와 벽송사를 거쳐 가는 긴 길과 바로 가는 짧은 길! 1차 기착지는 모전

마을. 충분한 정보도 없이 길을 나선다. - 둘레길은 단선이 아니다. 오

늘 이 코스처럼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갈래길이 여러 번 있는

데 오미에서 난동까지 구례 센터를 거쳐 가는 코스와 방광을 거치는 코

스, 그리고 이 구간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경우는 경로를 완전히 벗어

났다가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구간으로 하동 서당 마을에서 하동 읍내를

다녀오는 구간과 목아재에서 당재를 다녀오는 구간이 있다. 굳이 이런

경로들을 끼워 넣은 배경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두 지선 구간을

포함해 지리산 둘레길은 총 22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5년 3월 10일 09시. 일단 셀카봉을 이용해 역사적인 시작을 증명하

는 기념촬영을 하고 길을 나선다. 그런데 50대 초반의 세 중년이 여행 중

에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지 싶어 준비한 셀카봉을 능숙

하게 다루기에는 13일로도 부족했다. 심지어 마지막 며칠은 셀카봉을

충전하는 것마저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냥 짐으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이 길이 어떤 변곡점이 되기를, 삶과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전기가 되

기를 그래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배우기를 기원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겨울이 무색할 기온에 지리산 칠선계곡, 임천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벽송사로 향한다. -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당일 함양의 최저기온은 영

하 5.6도, 최고 기온은 3도다. - 호기 있게 두 개의 코스 중 벽송사를

거쳐 가는 긴 코스를 선택한다. “갈 수 있는 모든 곳은 다 들러 골고루

구경하고 간다.” 굳이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선언한

행동 수칙 같은 것이었는데 이 수칙은 채 48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수정

되었다.

 

우리의 앞길을 인도할 이정표. 소재지 군 내 일련번호와 각 구간의 시점

(始點)과 종점(終點)까지의 거리가 쓰여 있고 붉은 화살표(동쪽, 시계

방향)와 검은 화살표(서쪽, 반시계 방향)를 허수아비처럼 들고 있다. 간

혹 다른 모습을 한 변종들도 있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길 잃은

양이 되지 않으려면 저 화살표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인생 여정에도 이

런 이정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어쩌면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

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천왕을 비롯해 불교와 관련된 조각을 자연 암반 여러 곳에 새겨 둔 서

암정사로 접어드는 길목에서부터 갑자기 화살표가 사라졌다. 첫날 첫

구간부터. 걷기 시작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거다. 서로 말을 하

지는 않았지만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일단 들어가 보자. 스님이라도 계시겠지.”

경내를 돌고 나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스님, 지리산 둘레길을 돌고 있습니다. 벽송사를 거쳐 가는 길이 있는

지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벽송사를 거쳐 가는 길은 없고요, 절 입구에 있는 계단으로 다시 원점

으로 가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낭패다. 내가 길잡이인데. 날씨는 차고 길을 물어 볼 안내센터 웹 사이

트, 전화번호조차도 스마트폰에 찍어 두지 않았고. 셋은 다시 입간판 지

도 앞에 섰다. 이쪽이 동쪽이다, 이쪽이 북쪽이다 해 가며.

“일단 가자. 분명히 길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혹 못 찾으면 114에 물어 센

터에 전화하자. 벽송사는 이 절보다 더 크니 누구 아는 사람이 있겠지.”

 

그 순간 계속 내 귓전을 맴도는 소리, 하루에 청계산을 하나씩 넘어 다

녀야 한다고 했던 양재심 선배의 조언. ‘벽송사는 별로 볼 것도 없고 폐

쇄된 등산로가 있는데 좁고 한쪽이 낭떠러지라 위험해. 일부러 가지마.

꼭 가고 싶으면 택시를 타고. 아스팔트 임도를 굳이 걸어서 뭐하게.’ 그

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설명이 필요하면 설명해도 모른다.’

 

20여 분 올라가니 6.25 때 인민군 야전 병원으로 썼다는 벽송사다. 제

법 규모가 있고 단아한 모습인데 일행은 산사의 풍취에 젖을 마음의 여

유가 없다.

꽤 연세가 들어 보이는 보살님 한 분,

“둘레길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길이 없는데… 산 쪽으로 난 길은 낭떠러지라 위험하고, 사람들도 안

다녀.”

 

어쩔 수 없다. 114를 거쳐 둘레길 안내센터로 전화한다. 대한민국 남자

들 특히 글줄깨나 읽었다는 중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묻는’거다. 대

한민국 여자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 허나 지금은 그런 자존심

내세울 계제가 아니다. 대충 산 쪽으로 난 진입로에 대해 설명을 듣고

호기 있게 길을 나선다. ‘그러면 그렇지.’ 혹시 안내소로부터 정말 길이

없으니 원점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들었다면 나의 입지는 완전히 무너지

고 어쩌면 이 여행은 시작부터 상당 시간 표류했을지 모른다. 20여 분을

가다 보니 후미진 곳에 번듯한 현대식 한옥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다.

건물 앞을 지나니 길은 교행(交行)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아지고 들은 대

로 오른쪽은 경사가 대단하다. 바닥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람이 다녀

갔는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낙엽이 수북하다. 낙엽 밑 사정은 알 길이

없고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족히 십 수 미터는 구르지 싶다. 등산

스틱으로 낙엽을 쓸 듯 치우면서 내딛는 발걸음이 거의 야간 정숙 보행

수준이다. 둘레길은 절대 ‘둘러보며 가는 길’이 아니다.

 

“잠깐만! 다시 전화해 봐라. 이 길이 맞나?”

아니란다. 겨우겨우 살얼음판 디디듯 나섰던 길을 이제는 같은 방법으

로 되돌아간다. 마지막 보았던 이정표까지 왔다. 오던 중에 놓쳤던 길.

산등성이 방향으로 15도 정도 왼쪽을 향하고 있는 빨간 화살표가 ‘습관

적’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서 ’더 넓고 반듯한 길을 가리킨다고 지레 판

단한 것이다.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후 계속되는 오류도 결국

이런 고정관념 내지 희망이 앞선 경우가 많았다. 좀 더 냉정하게 판단했

다면, 화살표만 맹목적으로 따라갔다면 실종 횟수는 아마 반으로 줄었

으리라. 인생살이라고 다를까? 남은 길이 지나 온 길처럼 생겼다는 보

장이 있을까? 대부분 가고 싶은 길을 간다. 대부분 어제처럼 산다.

 

등성이로 난 돌계단 길을 오르니 계속 나타나는 빨간 화살표! 정말 고마

운 존재다. 조금 긴장이 풀어지니 이제는 오르막길이 부담스럽다. 이날

도 733m 봉우리를 하나 넘어야 했다. 자주 다니는 서울 청계산과 관악

산이 620m 정도이니 그 산들보다 족히 100m는 더 올라 가야 한다. 등

에 땀이 좀 맺힐 때쯤 등성이에 오르니 저 아래 보이는 도로와 마을이 눈

에 익은 모습이다. 함양을 찾을 때마다 보던 늘 그 모습이었다. 지난 여

름에도 지나쳤던. 오늘 아침에 시작하자 마자 다리로 건넜던 임천도 보

이고 마을도 제법 번듯하다.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이고 진정을 찾는다.

첫날, 첫 구간부터 제대로 신고식을 치렀다.

이 책은 유명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사진이 포함된 원고는 페이스 북 '백수라서 다행이다(
https://www.facebook.com/baggsu/)'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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