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시대' 이제 막 내리나?(3)

by 최화수 posted Apr 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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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겨울 노고단(老姑壇).
1945년 설립된 한국산악회와 1946년 출범한 한국스키협회가 손을 잡고 해방 이후 최초의 겨울산행 겸 스키대회를 열었으니, 그 의미와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되찾은 우리의 조국, 우리의 산하!
더구나 신라 때부터 나라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해온 신성한 제단 남악사(南岳祠)가 지리했던 노고단이다!

그 당시에는 산악인이 스키인이었고, 스키인이 산악인이었다고 한다.
스키는 전문적인 경기 스키가 아니라 겨울 등산의 수단이었다는 것.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스키를 할 수 있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산악회, 스키협회의 중심인물은 겹치기였고, 스키 알피니즘은 당연한 것이고, 겨울산에서 스키 활용은 기본이었다.”-손경석의 ‘지리산 터줏대감’(한국산서회 회지 <山書> 통권 제12호, 2001년 11월10일 발행)

노고단에서의 스키대회가 끝난 뒤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는 이들이 따로 모였다.
김정태, 신업재, 이재수, 고희성 외 2명.
노고단~임걸령은 일제시대 경성제대 연습림으로 원시림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종주 팀은 설화가 만발한 원시림 숲 속을 스키로 헤치고 나아갔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스키 등반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전진한 것.
처녀 지리산 종주의 상큼함, 열정과 낭만이 얼마나 꿈결처럼 파노라마를 이루었겠는가.

3박4일의 스키 산행 끝에 이들은 마침내 천왕봉에 닿았다.
노고단~천왕봉 지리산 주능선을 답파한 것.
“천왕봉 정수리에 올랐을 때 동태 같이 언 천막과 장비들이 키스링 색 위에서 온몸을 짓누르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배낭 무게에 비명을 지를 형편이었다.”
앞의 글(‘지리산 터줏대감’)이 이렇게 들려준다.

어쨌든 지리산 등반은 광복 후 스키 알피니즘의 첫 무대가 되었고, 장엄한 산릉의 지리산은 남한의 명산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산악회 초대 부산지부장 신업재씨가 지리산 터줏대감으로 정착한다. 그는 주말이면 지리산에 있었고, 지리산을 올라가기 위해 진주에서, 남원에서, 구례에서 동서남북에서 시발하는 여러 등산 코스를 섭렵했다.
한국산악회 부산 경남지부의 산은 지리산이었고, 신업재씨는 지리산 산자락에 잊지 못할 체취를 남겼다”-(손경석의 ‘지리산의 터줏대감’).

‘지리산 등산 안내도’를 최초로 제작한 지리산산악회의 전신인 연하반산악회는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이 끝난 다음해인 1955년 5월5일 구례중학교 우종수 교사 등 뜻있는 이들 몇몇이 만들었다. 지리산산악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0년이 지난 1965의 일이라고 한다. 필자의 고교 선배이자 언론계 선배인 이종길의 ‘지리영봉’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리산산악회로 이름이 바뀐 뒤 부회장을 맡은 함태식은 “연하반산악회는 공비 토벌이 끝나고 등산 여건이 어느 정도 호전되었던 1957년 우종수 선생 등 몇몇 뜻있는 이들이 모여 만든 산악인 모임이었다. 우 회장은 전문적인 등산 이론가로 산을 끔찍하게 아낀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종수는 공비 토벌을 끝낸 수도사단이 1954년 12월 철수하자 다음해인 55년 4월 구례중학교 동료 교사들과 함께 민간인으로서는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노고단 등정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으로 종전의 등산로를 찾을 길이 없고, 작전용 소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혼란만 주었다는 것.

첫 등산에 실패한 우종수는 노고단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역의 등산로 개척에 대한 강한 집념을 불태우게 됐다. 그는 55년 구례 지역 산악인들을 모아 연하반산악회를 만들어 다시 노고단 등정에 도전했지만, 잡초와 잡목에 막혀 1200미터 지점에서 어쩔 수 없이 되돌아서야 했다. 그는 그 해 5월을 넘기기 전에 다시 세 번째로 노고단 등정에 도전, 마침내 해발 1506미터의 노고단 정상에 서게 됐다.

지리산 주능선 등산로를 개척하고, 지리산 등산 안내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우종수의 연하반산악회(지리산산악회)가 발족한 것이 1955년 5월.
그런데 그보다 훨씬 앞선 1947년 1월 노고단에서 한국산악회의 겨울산행 겸 스키대회가 열렸던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신업재 등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3박4일에 걸쳐 스키를 이용한 최초의 지리산 종주산행까지 했으니, 경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신업재, 그이는 누구인가?
한국산악회 초대 부산지부장이다.
그이는 또한 부산의 이름난 의사였다. 그리고 또 있다.
천왕봉 길목의 법계사 앞 저 로타리산장을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 과정에는 신화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산정(山情)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엮여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