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시대' 이제 막 내리나?(2)

by 최화수 posted Mar 0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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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본격적인 등산시대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천왕봉을 꽤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큐슈대학과 교토대학이 연습림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천왕봉 등정을 짐작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가 않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산장이 있었다. 이 산장은 10여 평 크기의 완벽한 건물이었다. 천왕봉에는 예부터 성모석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의 반지하 토굴식 산장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으나, 정규 건물의 산장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지난 1990년 필자는 로타리산장 관리인 조재영씨로부터 1940년에 촬영된 한 장의 귀중한 사진을 건네받았는데, 바로 천왕봉 최초의 산장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사진으로 보면 남향으로는 세 개의 창이 열려 있고, 지붕 위에 기다란 판자들을 가로로 세 겹으로 눌러놓아 바람을 이길 수 있게 했으며, 벽체는 강건한 돌벽으로 돼 있었다.

이 사진은 중절모와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과 흰 한복 차림의 여러 사람들이 산장 주변에 서있는 모습도 담고 있다. 로타리산장 관리인 조재영씨는 ‘산청군지’ 편찬위원으로 여러 가지 옛 사료들을 찾던 중 시천면 사리(덕산)에서 이 뜻밖의 사진을 입수했다.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이두기옹(88세)으로 건강하게 활동을 하고 있어 천왕봉산장과 관련한 생생한 증언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산장은 함양의 모 유지가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사재를 희사하여 건립했다고 하는데, 이 사진은 산장의 준공을 기념하여 찍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산장이 어떤 식으로 관리가 되고 유지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빨치산 영웅인 남도부(본명 하준수)의 ‘함양군 야산대’(유격대)가 5.10 단선 반대 기치를 내걸고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서곡인 천왕봉 무장봉기를 한 것이 1948년 5월7일이다. 천왕봉 산장은 그 전후로 하여 없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산장이 세워진 것보다 훨씬 앞인 1920년대에 이미 주능선 서쪽 끝 노고단에는 서양선교사들의 수양관 건물이 52채나 들어섰다. 하지만 노고단 선교사 수양관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국가 기관에서 지리산에 산장(대피소)을 건립한 것은 제3공화국 시절인 1971년이 최초이다. 그보다 30년이나 앞서 한 개인의 뜻과 힘으로 천왕봉에 산장을 세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지리산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풀려났다. 해방이 되는 해에 한국산악회가 설립되었고, 다음해인 46년에는 스키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에는 등산과 스키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했다고 한다. 산악인이 스키인이고, 스키인은 당연히 산악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 등산도 노고단에서의 스키대회를 겸해서 열리게 되었다.

1946년 12월에서 47년 1월에 걸쳐 적설기 등산이란 이름으로 행사가 마련되었다. 이른바 ‘광복 후의 첫 겨울산행 겸 스키대회’였다. 노고단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내로라하는 산악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스키대회는 적설량이 빈약하여 친목대회 수준으로 끝나버렸다. 대회가 끝난 뒤 지리산 종주산행에 목적이 있는 이들이 따로 모였다. 김정태, 신업재, 이재수, 고희성 외 2명이었다. 지리산 신화시대의 서막은 이들에 의해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