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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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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시루봉 능선이 흘러내린 그 지맥이 섬진강 청류에 잠겨들며 잠시 휴식하는 곳! 강 건너 백운산 자락의 무성한 숲이 쏟아져 내릴 듯하니, 섬진강 하류에서 거슬러 오르다보면 최고의 협곡을 이루는 곳이다.
섬진강 양안을 줄나룻배라도 오고갈 듯 하지만, 그러나 천연요새의 지형적 특징으로 일찌기 구례지방 최후의 방어선이 됐다.
'석주관(石柱關)'으로 불리는 바로 이 곳이 지리산에선 가장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고전장(古戰場)이다. 구례 사람들의 고귀한 정신과 얼이 깃들어 있는 숭고한 곳이기도 하다.

피아골 진입도로가 시작되는 외곡리에서 구례 쪽으로 2㎞쯤 가면 요즘 많은 지리산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두레네집'(옛 토지초등학교 송정분교)이 있다.
거기서 산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바른편에 '숭의각'이란 기와집 건물이 자리하고, 그 맞은편 언덕에 '칠의단(七義壇)'이 있다.
울창한 수림 한편에 담을 막고 큰 비석 두개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7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이 자리한다. 추념비의 뒷면에는 "나라 위해 모집에 응하고 주인 위해 내 몸을 잊었네...'란 내용의 글이 한자로 씌어져 있다.

석주관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지방의 무명 인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다수의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의사(義士) 7인을 모시고 있다.
석주관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요새지로, 하동에서 구례를 향해 오는 적을 막을 수 있는 호남의 중요한 전략지였다. 따라서 예로부터 성을 쌓고 진을 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방어사 곽영이 성을 다시 쌓았다. 정유재란 때 수만의 왜병이 석주관에 들이닥치자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은 중과부적으로 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전사했다.

구례 사인(士人) 왕득인(王得仁)이 장정 백수십 명을 거느리고 석주관을 지키려 하였으나, 그도 또한 전사하고 말았다.
적들이 구례현에 들어와 방화와 겁탈을 자행하자 이를 보다 못한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과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은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 화엄사 승병과 합세하여 다시 석주관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적의 대군이 대거 내습해 오자 수적 열세로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1천여명의 의병과 화엄사 승병 153명이 일시에 옥쇄했다.

왕의성은 고지(高地)에 포진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으나, 나머지 다섯 의사는 모두 순절하였다.
순조 4년(1805년) 나라에서는 7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고, 순조 14년 석주관에서 순절한 왕득인과 아들 왕의성, 5의사 등 7의사의 단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1963년 사적 제 10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또 이 현감과 일곱 의사의 초혼총이 모셔져 있고, 현재 칠의사 묘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석주관 칠의사당과 의병 추념비, 그리고 전 무명용사위패비(승병 153명, 일반의병 3,500명)가 있다.

요약하자면 구례현감이 전사하자 구례 사람들이 나섰고, 일반의병과 승병들이 나서 싸웠지만 거의 전원이 옥쇄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화엄사 승병'이라고 돼 있지만, 연곡사에서도 승병을 일으켜 참여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연곡사에 들러 구례현감 이원춘과 석주관 전투를 논의한 것에서 충분히 짐작이 된다.
사실 석주관성을 따라 능선을 계속 따라 오르면 연곡사와 오고가는 고갯길과 이어진다. 석주관은 화엄사보다 연곡사와 더 깊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주관성이 자리한 능선은 칼날같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이런 곳에 성을 쌓은 뜻은 능히 짐작이 간다.
정유재란 때 이곳을 지키던 승병과 의병들은 왜적의 조총 공세에 후퇴하는 대신 능선을 따라 밀려 올라갔다. 왜군은 정면과 척후를 에워싸고 공격했고, 완전 포위된 승병과 의병들은 결국 옥쇄를 했다.
그곳이 곧 송정리 본동 일원으로 한수내가 피의 바다를 이루었단다.
두레의 아버지 안윤근님이 송정리 주민에게 들은 얘기다.
한수내는 송정리를 거쳐 두레네집 앞에서 섬진강에 흘러드는 계류이다.

흔히들 '피아골'을 피가 내를 이룬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 이도 있다. 물론 피아골 일대도 고광순 의병부대가 연곡사를 거점으로 항전하는 등 전장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다.
하지만 피가 내를 이룬 곳은 두레네집이 있는 '한수내'인 것이다. 지리산에서 석주관 전투가 가장 처절했다고 말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리산을 찾는 오늘의 우리가 옛 선인들의 구국의 정신과 혼이 숨쉬고 있는 석주관을 어찌 모른 채 지나칠 것이며, 또 그곳을 찾아 어찌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
                                          'Daum 칼럼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에서 재록'
  • ?
    오 해 봉 2007.09.08 12:14
    전에 읽었어도 다시읽으니 좋습니다,
    석주관 옆으로지나 다니면서도 못가보았는데
    조만간에 가보겠습니다,
    여산선생님 좋은공부 고맙습니다,
    다음달에 달빛초당이든 다오실이든 만나도록 해보세요.
  • ?
    최화수 2007.09.09 12:26
    9월8일, 모처럼 가을 하늘이 활짝 열렸었지요.
    노고단 산장 앞에 막 도착하려는데 손전화 벨이
    울리더군요.
    역시 오해봉님이었습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느라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오해봉님, 10월초 설악산 다녀오신다니, 그 다음
    주말쯤 만나뵙도록 하지요.
    솔메거사님도 함께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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