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은 어느 곳에 있는가?

by 최화수 posted Dec 2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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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불일폭포 오두막의 변규화님이 필자에게 '지리산의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들려주었다. 광주(光州)와 진주(晋州) 산꾼이 만나면 서로 자기들이 지리산의 주인이라며 싸우다시피 열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두 도시 시민의 지리산 애정이 그만큼 각별함을 알게 해준다. 광주가 지금은 광역시지만 전남의 도청소재지, 진주는 경남의 도청소재지였던 때가 있었다. 두 도시 산악인은 전남과 경남을 대표하여 지리산 사랑의 집착을 경쟁적으로 보여주었을 법하다.

'뿌리깊은 나무'가 발행한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은 지리산을 전남도편에 포함시켰다.
2000년 문화관광부와 국립국어연구원이 국어 표기법 개정에 따라 펴낸 <로마자 표기 용례사전>과 <표준 국어대사전>에 지리산과 천왕봉을 '전남의 산', '경북, 전남, 전북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적어 경남 산청, 함양, 하동 주민들이 수정을 요구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전남, 전북, 경남에 걸쳐 있는 산을 왜 '전남의 산'이라고 했을까? 지리산을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전남과 전북을 합쳐도 경남보다 적다.
이성계가 소지가 타오르지 않은 '불복산(不伏山)'이라 하여 지리산을 전라도에 귀속시켰다는 전설을 들어 지리산을 '전남의 산'이라고 한 것일까?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이 자리한 곳은 어디인가? 그 지적(地籍)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이다. 경남 산청, 함양군의 경계 지점이므로 두 지역 주민들은 천왕봉이 서로 자기네 땅에 있다고 말한다.
천왕봉 지번이 산청과 함양에 물려 있지만, 두 군은 모두 경남도 소속이다. 그렇다면 지리산 천왕봉은 '경남의 땅'이라고 자랑해도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따른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해프닝이 있었으니...

지난 1982년 6월의 한 일요일이었다. 이규효 당시 경남도지사와 산청, 함양 지역구 출신 민정당 실력자 권익현 의원이 헬기를 타고 천왕봉에 날아왔다. 경남의 각급 기관장과 수많은 공무원들은 미리 천왕봉에 걸어올라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남도가 마련한 새로운 천왕봉 표지석을 세웠다. 높이 1.5미터의 자연석 앞면에 '지리산 천왕봉 1,915미터', 뒷면에는 '경남인(慶南人)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 '경남인'이란 글자가 문제가 됐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이므로 천왕봉이 경남인의 전유물일 수가 없지 않겠는가.

천왕봉의 행정구역이 경남이라고 해서 경남인의 기상이 발원하는 영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천왕봉은 우리나라 무조설(巫祖說)의 시원지로 마고(麻姑, 또는 마야부인)가 8명(또는 100명)의 딸을 이곳에서 낳아 8도를 다스리는 무당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천왕(天王)'이란 영봉의 명칭도 이곳에 모셔졌던 성모상(聖母像)을 그렇게 불렀다거나, 그 신상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니 천왕봉은 '경남의 산'이 아니라 '한국의 산'이다.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 '경남인의 기상'을 '한국인의 기상'으로 고쳤다. 그것이 곧 지금의 표지석이다.

천왕봉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박여량(朴汝樑)의 <두류산일록>이 도움이 될 듯하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천왕봉은 경남 한 지방을 굽어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이니 한국인 모두의 영봉이다.
천왕봉은 어디에 있느냐? 산청군 시천면, 또는 함양군 마천면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찌 그렇게만 말하겠는가?
천왕봉은 지리산의 가장 높은 곳, 우리의 마음과 함께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