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사라진 '쌍계별장'

by 최화수 posted Nov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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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아름다운 집 가운데 하나인 ‘쌍계별장’이 문을 닫았다. 쌍계별장은 원래의 도원암(桃園菴) 암자로 되돌아갔다. 대문에는 ‘쌍계별장’ 현판이 사라지고, ‘桃園菴’이라는 새 문패가 달렸고 ‘사찰 암자로 내부 수리중’이란 안내글도 내걸려 있다.

쌍계별장은 지난 70년대 이래 지리산, 특히 화개동천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겨운 쉼터이자 내집 같은 숙소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고즈넉한 산사분위기와 함께 처음 이 집을 열었던 할머니와 그 아들 내외가 베풀어주던 인정도 특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장이 아니라 암자로 되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쌍계별장이 왜 암자로 되돌아간 것일까? 거기에는 무슨 사정이 있을까? 요즘 쌍계사 입구의 진입로 등 지도가 달라진 것을 보면 심상치않은 느낌도 없지 않다.

쌍계별장의 전신은 쌍계사의 도원암 암자였다. 그러니 원래의 도원암 암자로 되돌아간 것이 당연할(?) 것도 같다. 하지만 쌍계별장과 정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쌍계별장이 그만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움을 넘어 안타깝기만 할 것이다.

쌍계별장과 관련한 추억을 ‘추억의 지리산, 사랑의 지리산’이란 이름으로 썼던 필자의 지난 글 가운데 일부를 아래에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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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2월, 신혼여행으로 쌍계별장을 찾았지만 우리는 등산복 차림이었다. 지리산 여로를 소개해준 선배 박 아무개가 등산복 차림을 권했었고, 나 역시 등산복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여행가방 대신 배낭을 메고, 사전에 전화 한 통 없이 무턱대고 찾았는데도 쌍계별장 할머니는 마치 고향집을 찾은 자식을 대하듯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8폭 병풍을 두른 서쪽 별채의 큰 방을 내주었고, 가마솥 가득 물을 데워 얼굴도 씻고 발도 닦으라고 했다. 그리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산해진미로 그득한 밥상을 정성껏 차려주었다. 처음 보는 젊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칙사 대접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장작불 군불로 방바닥이 펄펄 끓는데도 구석구석 손을 대보며 따뜻한가를 확인했고, 비단금침을 내주었다. 신혼여행이란 말은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정말 신혼부부의 최고최대 환대를 받았다. 할머니가 어떻게나 말을 곱고 인정 넘치게 하는지 나는 다음날 아침 불일폭포에 오를 계획도 잊어먹고 뜰에서 정겨운 얘기를 나누었다.

당시 쌍계별장에는 고시공부를 하는 듯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은 할머니를 닮아서인지 모두가 처음 대하는 우리에게 친절했다. 신부가 카메라로 나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굳이 자신들이 찍어주겠다며 끝까지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중에 보니 모조리 실패작으로 사진이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박 아무개는 나에게 불일폭포를 찾은 뒤에는 칠불암과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등을 찾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2박3일이 됐지만, 겨우 쌍계사 한 곳밖에 들리지 못했다. 부산까지 돌아가는 시간이 걱정되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고 쌍계별장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쌍계사도 쌍계별장과 붙어 있어 겨우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계산을 치르자고 하니 할머니는 뜻밖의 말씀을 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돈 안 받아도 되니 그냥 가요!" 나는 너무 놀라 그럴 수는 없다고 맞섰다. "저엉 그러면 집에 갈 여비를 빼고 남는 돈이 있다면 줘요." 할머니는 끝까지 숙식비가 얼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건넨 돈의 절반 이상을 기어이 되돌려주는 것이었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