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덕 마을' 정씨 할머니

by 최화수 posted Oct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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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덕이 태어나고 13년 동안 빨치산 활동을 하다 총을 맞고 사로잡힌 안내원 부락. 수십년 동안 귀틀집들이 죽은 듯이 자리했는데, 지금은 고래등처럼 큰 양옥이 들어서 있다.
지리산 어느 마을이든 건축허가를 받고 새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주변 지세와 어울리지도 않고, 피서지 경승지도 아니면서 '민박' 겸용 음식점이 들어서니 좀 무엇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정말 다행하게도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나무와 흙으로 지은 아담하고 정갈한 새로운 오두막 한 채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집 구경을 하고자 뜨락을 기웃거리자니 현관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웬놈들이 남의 집을 기웃거리느냐!"고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할머니는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부터 했다.
"들어와요, 들어와! 차라도 한 잔 하며 쉬다가 가요."
아니, 산중고도(山中孤島)와 같은 오두막에 살면서 낯선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렇게도 친절할 수가 있을까. 처음 얼굴을 대하는 할머니여서 우리 쪽에서 오히려 머뭇거렸다.
"비 맞지 말고 들어와, 어서!"
할머니의 맑고 밝은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나무와 흙으로 정성들여 지은 집은 내부 구조도 훌륭했다. 드넓은 거실과 입식부엌, 냉장고 등이 잘 갖추어져 있고, 통유리에 통째로 지리산 푸른 숲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들 일행 20명이 둘러앉아도 전혀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쁜 집의 사연은 꽤나 우울했다. 조카사위가 이 집을 짓다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그래서 조카딸은 이 집이 정나미가 떨어진다면서 대처로 나가버렸고, 진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빈집으로 버려둔 것이 아까워 여름, 가을철에 얼마간 와서 머문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상당한 미모를 뽐냈을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혼자 오두막을 지킨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성격이 활달하고 직선적이었다. 무슨 말이든지 숨기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거침없이 했다.
"이 깊은 산중에 혼자 사시면 무섭지 않아요?"
"무서울 게 뭐야, 재산이 있나, 젊음이 있나, 도둑이 들어도 훔쳐갈 게 없잖소."
할머니의 유머감각은 아주 특출했다.
"3만 원만 저기 얹어둔다오. 도둑이 들면 그 돈이나 가져가라고 하지. 돈만 가져가면 잘 가라고 배웅까지 해주고말고! 도둑님 다녀가셨다고 소문낼 일도 없지요!"

정(鄭)씨 할머니, 지난해부터 이 집을 지킨다는 진주 할머니는 안내원부락의 비극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1963년 이 마을에서 '망실공비 2인부대' 정순덕과 이홍희의 13년 재산투쟁을 마감하게 했던 삼장지서 두 경찰관 중 한 사람이 친구의 남편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또 마을 할머니들로부터 안내원골의 고난과 고통의 역사를 소상하게 들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정순덕의 생가는 마을앞 공터로 버려져 있고, 이홍희와 정순덕이 최후를 맞이한 집이 큰 양옥으로 변신한 것도 할머니가 알려주었다.

정순덕에 대한 정씨 할머니의 생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정순덕이 끄나풀로 이용했던 이 마을의 정위주씨 형제 부부와 임신중인 아이까지 다섯 명의 생목숨을 앗아갔던 그 끔찍한 사건은 이유가 무엇이든 용납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이런 생각에는 정순덕을 사로잡은 친구 남편 경찰관의 얘기도 상당히 영향을 미친 듯하다.
사실 '지리산 빨치산의 상징적인 여전사' 정순덕에 대한 평가는 함부로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입산이나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는 과정이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 아니던가.

"옛날에는 저 절터골에도 화전민이 살았어요. 젊은 화전민 부부가 숯을 구워 진주까지 지고 가서 내다 팔았지요. 쌀 됫박을 사서 돌아오는데 눈이 퍼부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굶고 있을 아이들이 걱정되어 부부는 쉬지도 못하고 내원골을 따라 올랐다네요. 그런데 여자가 남자보다 독한 거라요. 남편이 먼저 쓰러지고, 부인은 거기서 한참 더 걸어올라 쓰러져 둘 다 죽었다네요. 이 내원 골짜기가 정순덕만이 아니라, 갖가지 사연들로 사회에서 소외받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슬픔과 고난이 묻혀 있는 곳이구만요."

정씨 할머니는 타고난 낙천적인 천성으로 친절하고 활달하고,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우스개를 잘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때가 없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수용하는 건강한 삶의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7순 나이를 몇 해 남겨두지 않은 할머니의 가슴 속에는 내원골의 아픈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가난하고 소외받은 주민들의 인고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안내원부락은 한가한 사람들의 피서지나 휴양지로 둔갑이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