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1810 댓글 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정순덕이 태어나고 13년 동안 빨치산 활동을 하다 총을 맞고 사로잡힌 안내원 부락. 수십년 동안 귀틀집들이 죽은 듯이 자리했는데, 지금은 고래등처럼 큰 양옥이 들어서 있다.
지리산 어느 마을이든 건축허가를 받고 새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주변 지세와 어울리지도 않고, 피서지 경승지도 아니면서 '민박' 겸용 음식점이 들어서니 좀 무엇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정말 다행하게도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나무와 흙으로 지은 아담하고 정갈한 새로운 오두막 한 채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집 구경을 하고자 뜨락을 기웃거리자니 현관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웬놈들이 남의 집을 기웃거리느냐!"고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할머니는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부터 했다.
"들어와요, 들어와! 차라도 한 잔 하며 쉬다가 가요."
아니, 산중고도(山中孤島)와 같은 오두막에 살면서 낯선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렇게도 친절할 수가 있을까. 처음 얼굴을 대하는 할머니여서 우리 쪽에서 오히려 머뭇거렸다.
"비 맞지 말고 들어와, 어서!"
할머니의 맑고 밝은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나무와 흙으로 정성들여 지은 집은 내부 구조도 훌륭했다. 드넓은 거실과 입식부엌, 냉장고 등이 잘 갖추어져 있고, 통유리에 통째로 지리산 푸른 숲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들 일행 20명이 둘러앉아도 전혀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이쁜 집의 사연은 꽤나 우울했다. 조카사위가 이 집을 짓다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그래서 조카딸은 이 집이 정나미가 떨어진다면서 대처로 나가버렸고, 진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빈집으로 버려둔 것이 아까워 여름, 가을철에 얼마간 와서 머문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상당한 미모를 뽐냈을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혼자 오두막을 지킨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성격이 활달하고 직선적이었다. 무슨 말이든지 숨기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거침없이 했다.
"이 깊은 산중에 혼자 사시면 무섭지 않아요?"
"무서울 게 뭐야, 재산이 있나, 젊음이 있나, 도둑이 들어도 훔쳐갈 게 없잖소."
할머니의 유머감각은 아주 특출했다.
"3만 원만 저기 얹어둔다오. 도둑이 들면 그 돈이나 가져가라고 하지. 돈만 가져가면 잘 가라고 배웅까지 해주고말고! 도둑님 다녀가셨다고 소문낼 일도 없지요!"

정(鄭)씨 할머니, 지난해부터 이 집을 지킨다는 진주 할머니는 안내원부락의 비극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1963년 이 마을에서 '망실공비 2인부대' 정순덕과 이홍희의 13년 재산투쟁을 마감하게 했던 삼장지서 두 경찰관 중 한 사람이 친구의 남편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또 마을 할머니들로부터 안내원골의 고난과 고통의 역사를 소상하게 들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정순덕의 생가는 마을앞 공터로 버려져 있고, 이홍희와 정순덕이 최후를 맞이한 집이 큰 양옥으로 변신한 것도 할머니가 알려주었다.

정순덕에 대한 정씨 할머니의 생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정순덕이 끄나풀로 이용했던 이 마을의 정위주씨 형제 부부와 임신중인 아이까지 다섯 명의 생목숨을 앗아갔던 그 끔찍한 사건은 이유가 무엇이든 용납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이런 생각에는 정순덕을 사로잡은 친구 남편 경찰관의 얘기도 상당히 영향을 미친 듯하다.
사실 '지리산 빨치산의 상징적인 여전사' 정순덕에 대한 평가는 함부로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입산이나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는 과정이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 아니던가.

"옛날에는 저 절터골에도 화전민이 살았어요. 젊은 화전민 부부가 숯을 구워 진주까지 지고 가서 내다 팔았지요. 쌀 됫박을 사서 돌아오는데 눈이 퍼부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굶고 있을 아이들이 걱정되어 부부는 쉬지도 못하고 내원골을 따라 올랐다네요. 그런데 여자가 남자보다 독한 거라요. 남편이 먼저 쓰러지고, 부인은 거기서 한참 더 걸어올라 쓰러져 둘 다 죽었다네요. 이 내원 골짜기가 정순덕만이 아니라, 갖가지 사연들로 사회에서 소외받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슬픔과 고난이 묻혀 있는 곳이구만요."

정씨 할머니는 타고난 낙천적인 천성으로 친절하고 활달하고,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우스개를 잘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때가 없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수용하는 건강한 삶의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7순 나이를 몇 해 남겨두지 않은 할머니의 가슴 속에는 내원골의 아픈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가난하고 소외받은 주민들의 인고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안내원부락은 한가한 사람들의 피서지나 휴양지로 둔갑이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
    최화수 2007.10.12 17:55
    이 글은 2002년 9월25일에 작성, Daum 칼럼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에 실었던 글입니다. 벌써 5년 반의 많은 세월이 지났군요.
    '정순덕 마을'의 정씨 할머니는 당시 섬호정 오영희 선생님과 솔메거사님 등과 함께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지요. 그때 우리는 대원사주차장에서 만나 밤이 깊도록 많은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지리산 이야기' 답사팀 20여 명이 자리를 함께 했었지요. 그 날의 일들이 문득 그립게 떠올라 '정순덕 마을' 정씨 할머니 이야기를 다시 싣습니다.
  • ?
    섬호정 2007.10.13 02:53
    예~ 여산선생님! 대원사 골짜기 정순덕 마을의 진주출신 정할머니의 구수한 재담이 다시 떠 올라 즐겁습니다 청산유수같던 그이야기에 정순덕처럼 지혜롭고 야무진 젊은 날이 있었겠다 싶었지요 사상적으론 아니지만...솔메거사님의 푸짐한 영광굴비 구이에 염치 없이 먹어본 그 굴비맛 ! 오직 지리산 통신 모임 덕분이었지요~언제고 돌아가면 보은을 해야겠다 싶습니다 영광이든, 부산이든, 지리산하이든지요...항도 부산의 영화제를 뉴스로 보며 그곳분들의 바쁘신 일정들을 떠올렸습니다 좋은 가을 되십시요 아직도 엘리콧시티에서 합장
  • ?
    김현거사 2007.10.13 06:02
    솔메거사!
    그 다정하던 이름이 새롭습니다.
  • ?
    오 해 봉 2007.10.15 09:17
    여산선생님 섬호정선생님 김현거사님 편안 하시지요,
    솔메님은 내년봄에나 뵐수있을것 같습니다,
    여산선생님 ofof.net 설악산모임 진행 여부를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 ?
    섬호정 2007.10.31 19:50
    이글을 다시읽습니다 가까이시라면 우얗든 자주 만나십시요~ 그것만이 삶의 여생에 활력이 생기기도 할것 같습니다 보고도 말씀도 듣고도 싶은 님들을 가까이 못 뵙는 심사는 외로운 고도에 선 기분입니다.ㅎㅎ

    솔메거사님의 영광굴비 맛! 자근자근 오래도 맛있게 먹던 진주 친구 김교장과의 오랫만의 통화에서 이글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하하...

  1. No Image

    최상의 기호품 덕산 곶감(1)

    "시천 마천 큰애기 곶감깎기로 다 나간다"는 지리산 민요의 그 시천(矢川)과 마천(馬川)은 일찍부터 곶감으로 유명하다. 지리산 농가들이 늦가을부터 곶감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 일대는 집집마...
    Date2007.10.22 By최화수 Reply2 Views1924
    Read More
  2. No Image

    '정순덕 마을' 정씨 할머니

    정순덕이 태어나고 13년 동안 빨치산 활동을 하다 총을 맞고 사로잡힌 안내원 부락. 수십년 동안 귀틀집들이 죽은 듯이 자리했는데, 지금은 고래등처럼 큰 양옥이 들어서 있다. 지리산 어느 마을이든 건축허가를 받고 새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탓할 수 없다. ...
    Date2007.10.12 By최화수 Reply5 Views1810
    Read More
  3. No Image

    '정순덕 고향' 안내원마을

    내원사 앞에서 장당골과 내원골의 두 계곡물이 합쳐진다. 사찰 바른쪽이 장당골이고, 왼편이 내원골이다. 장당골은 아주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게 이어지지만, 내원골은 이른바 '황금능선'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는다. 내원골에도 광산 개발을 위한 산판도로...
    Date2007.10.03 By최화수 Reply3 Views1988
    Read More
  4. No Image

    섬진강 기적-오영희 출판회

    다음은 지난 2002년 10월21일자 Daum 칼럼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에 올렸던 글입니다. 섬호정님의 <섬진강 소견> 출판기념회가 섬진강변 두레네집에서 열렸었지요. 섬호정 선생님과 여러분에게 그리운 마음을 전하면서 추석 인사를 대신하여 그 때의 글을 다...
    Date2007.09.23 By최화수 Reply7 Views1765
    Read More
  5. No Image

    석주관 어찌 그냥 지나치랴!

    왕시루봉 능선이 흘러내린 그 지맥이 섬진강 청류에 잠겨들며 잠시 휴식하는 곳! 강 건너 백운산 자락의 무성한 숲이 쏟아져 내릴 듯하니, 섬진강 하류에서 거슬러 오르다보면 최고의 협곡을 이루는 곳이다. 섬진강 양안을 줄나룻배라도 오고갈 듯 하지만, 그...
    Date2007.09.07 By최화수 Reply2 Views1526
    Read More
  6. No Image

    연곡사의 부도와 순절비(2)

    연곡사의 부도와 순절비를 뒤늦게 찾아본 필자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사찰을 드나들거나 지나친 것이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하지만 필자는 ×눈에 ×만 보인다는 속담처럼 엉뚱한 것에만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연곡사는 필자에게 지리산을 어...
    Date2007.08.29 By최화수 Reply4 Views1956
    Read More
  7. No Image

    연곡사의 부도와 순절비(1)

    ['다음 칼럼' 재록입니다] 필자의 대학 선배 박아무개님은 학교에 나오는 것보다 전국을 떠도는 날이 많았고, 등교를 해도 강의실보다 술집에 있을 때가 더 많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이는 필자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는 나타나 부조할 돈이 없다며 그 대신 ...
    Date2007.08.27 By최화수 Reply0 Views1637
    Read More
  8. No Image

    [납량 6] 종녀촌의 '성축제'

    [납량 6] 종녀촌의 '성(性)축제' 2002년 08월 02일 오래 전에 '전설따라 삼천리'란 라디오 방송 프로가 있었다. 용이 못 된 이무기며, 사람으로 변신한 백여우, 뱀과 까치의 싸움하며 으시시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전설따라...'보다 더 뇌리에 깊이 ...
    Date2007.08.17 By최화수 Reply1 Views2102
    Read More
  9. No Image

    [납량 5] 곤두선 머리카락...

    [납량 5] 곤두선 머리카락... 2002년 07월 31일 꼭 10년 전 가을철이었다. 부산의 산악인 이광전 님은 내원골로 올라 이른바 '황금능선'을 따라 단독산행을 했다. 지독한 산죽과 잡목을 헤치고 써래봉으로 오르는 능선으로 올라서느라 땀을 한 바탕 흘린 그이...
    Date2007.08.17 By최화수 Reply1 Views1746
    Read More
  10. No Image

    [납량 4] 목기막의 불청객들

    [납량 4] 목기막의 불청객들 2002년 07월 28일 지리산 골짜기 속의 골짜기로 '절터골'이 있다.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李鉉相)이 미스터리의 죽음을 맞이했던 '빗점골 합수내 흐른바위'가 이 절터골의 시작이다. 의신마을에서 벽소령을 넘어가는 군사작...
    Date2007.08.17 By최화수 Reply1 Views197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0 Next
/ 3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