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덕 고향' 안내원마을

by 최화수 posted Oct 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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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앞에서 장당골과 내원골의 두 계곡물이 합쳐진다. 사찰 바른쪽이 장당골이고, 왼편이 내원골이다. 장당골은 아주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게 이어지지만, 내원골은 이른바 '황금능선'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는다.
내원골에도 광산 개발을 위한 산판도로가 나있었는데, 요즘은 안내원부락까지 시멘트 포장이 돼 있다. 내원골은 입구 쪽에 우성구씨 집 등 몇 가구가 있고, 위쪽 배양이마을에 몇 가구, 마지막으로 안내원에 또 몇 가구의 집이 있다.
안내원부락은 내원사에서 3.5㎞, 해발 800미터에 자리한다.

산줄기 사이로 좁다랗게 이어진 내원골은 마지막 마을인 안내원부락을 지나면 의외로 드넓은 분지를 좌우편에 두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찰이 자리하여 '절터골'로 불렸다. 내원사에 안치된 보물 비로자나불상도 이 절터골에서 발굴된 것이다.
안내원부락은 지리산의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경작할 땅도 좁은데다 자연풍광이 수려한 곳도 아니다. 지난날 화전민들이 눌러앉은 곳으로 10년 전까지만 해도 10여채의 윤판집이 전부였다. 주민은 산죽을 끊어와 조릿대를 만드는 등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필자는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 안내원부락을 비교적 자주 지나쳤다. 그 때는 삼장면사무소 소재지 대포리에서 걷기 시작, 이 마을을 지나 국사봉(?)까지 다녀오는 당일산행을 주로 했었다.
안내원부락은 언제나 잠자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어쩌다 주민이 눈에 띄기도 했는데, 우리가 접근하면 금세 모습을 감추고는 했었다. 외지인과의 대화마저 기피하는 듯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이 마을을 지나치면서도 '망실공비 2인부대'로 유명한 정순덕(鄭順德)의 생가를 확인하지 못 했었다.

지리산의 깊은 산간마을에는 나름대로 어떤 매력이나 특징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심원마을은 원시림과 청정계류를, 오봉마을은 산간오지의 정취가, 삼정마을이나 새재마을은 주능선 등산구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안내원부락은 무엇이 특징인지 얼핏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곳과 달리 주민들이 외지 내방객과 대화를 기피하는 것부터 그러했다.
오봉, 새재, 삼정마을에 '민박' 간판이 내걸렸을 때도 이곳 안내원부락은 민박이란 말조차 몰랐다. 민박을 받을 만한 제법 반반한 집조차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안내원부락은 정순덕의 생가가 있는 고향마을이고, 그녀가 13년 동안에 걸친 재산(在山)투쟁을 마감하고 사로잡힌 곳이기 때문이었다.
1955년 5월 지리산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 섬멸되었습니다'란 안내문을 내걸었다. 48년 10월 여순병란 이래 2만여명의 빨치산과 인민군이 맞아죽고 굶어죽고 얼어죽고, 군경토벌군 수천명도 희생된 끝에 지리산이 평화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안내원부락은 결코 '평화의 지리산'이 아니었다.

안내원부락 출신 정순덕은 홍계리 출신 이홍희(이)와 '2인부대'로 여전히 지리산을 누비고 다니며 그로부터 8년을 더 용맹(?)을 떨쳤다.
정순덕 이홍희의 재산투쟁은 1963년 11월18일 한밤중 잠복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이 안내원부락에서 비극적으로 마감된다.
그때까지 이 '망실공비 2인부대'는 쌍계사 뒤편 화전 농막 일가족 살해, 안내원부락의 형제 가족을 몰살시키는 등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엄청난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1962년 10월10일, 안내원부락에선 엄청난 유혈참극이 빚어졌다. 형제간인 정위주 부부, 정정수 부부와 정위주 아내 뱃속의 아기까지 다섯 목숨이 정순덕 이홍희에 의해 학살됐다.
정순덕은 고향마을의 정위주씨 형제를 위협하여 생필품 구입과 정보를 얻는 끄나풀로 이용했었다. 이 정씨 형제가 변심, 정순덕을 사로잡으려다가 도리어 희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순덕 이홍희는 또다른 주민 끄나풀인 성수복씨의 밀고로 삼장지서 김영구 박기수 두 경찰의 총격 세례를 받고 13년 재산투쟁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유혈이 낭자했던 산중오지 안내원 부락의 상처는 아직도 씻겨지지 않고 있다. 마을 입구에 '구들장 아지트'며, '정순덕 생가터' 표시가 내걸려 있다. 하지만 지난날의 윤판집은 폐가로 버려진 한 채만 남겨두고 모두 철거되고 없다.
그 대신 웬 고래등과도 같은 2층 집들이 들어섰다. 집이 어떻게나 큰 지 무슨 특별한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높은 곳에 왜 이처럼 대형주택들이 들어섰는지 아리송하다.
이런 집들은 정순덕의 지리산 투쟁에 대한 상상마저 흔들어 놓는다.
(지난 2002년 9월22일에 쓴 글입니다-최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