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사의 부도와 순절비(2)

by 최화수 posted Aug 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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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의 부도와 순절비를 뒤늦게 찾아본 필자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사찰을 드나들거나 지나친 것이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하지만 필자는 ×눈에 ×만 보인다는 속담처럼 엉뚱한 것에만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연곡사는 필자에게 지리산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아프게 깨우쳐주었다. 피아골을 거쳐 노고단이나 삼도봉에 오르는 것에 급급했던 것은 산행시간에 쫓겨 그렇다 치자.
연곡사에 들러 을씨년스러운 폐허가 전부인 것처럼 제멋대로 단정했던 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노릇인가.

부도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墓塔)이다. 부도는 넓은 의미에서 불탑(佛塔)에 포함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승려의 묘탑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찰 입구에 다양한 부도군들이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무슨 단지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연곡사 부도들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어떤 빼어난 불탑 못지 않다.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등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연기조사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생각하지 않아도 아주 환상적이다.

연곡사는 화엄사와 함께 신라 사찰의 지리산 입산 제1호로 기록돼 있다.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가 화엄사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근래에는 연곡사가 화엄사보다 늦게 세워졌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지난날 화엄사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었던 연곡사다. 연곡사는 화엄사와 비교가 되는 것이 꽤 많다. 우선 각황전 등을 잘 보존하고 있는 화엄사와 달리 연곡사는 당우 하나 남겨놓지 않고 잿더미로 변한 채 버려져 있었다.
왜 연곡사에는 참담한 질곡의 역사가 처절하게 겹쳐졌던가?

이 의문을 설명해주는 상징적인 비가 연곡사 경내에 자리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순절비'이다. 구한말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의병활동이 벌어졌다.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이는 1907년 8월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야간기습을 받아 아깝게 순절했다. 이 때 일본군은 연곡사를 함께 불태워버렸다.
경내에 그이를 기리는 순절비가 서 있는 것은 사찰 역사와 결코 무관치 않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연곡사는 700 승병을 일으켜 섬진강변의 천연요새 석주관(石柱關)에 나가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했다.
정유재란 때는 다시 연곡사에서 150여명의 승병을 일으켜 일반의병 3500명과 합세하여 피의 전장인 석주관으로 거푸 나섰다. 이 때도 승병들은 중과부적으로 의병들과 함께 모두 순국했다.
연곡사가 항왜(抗倭)의 처절한 역사를 지닌 사실은 임진란 때 이충무공(李忠武公)이 이곳에 들러 의병장 이원춘(李元春)과 석주관 전투를 논의한 것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석주관에는 연곡사 승병들의 순국을 추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한자로 새겨놓은 비문의 뜻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라 위해 모집에 응하고, 주인 위해 내 몸을 잊었네. 중이라고 어찌 가리랴. 기꺼이 나라 위해 일어섰도다. 핏물이 내를 이룸을 한 조각의 돌에 사연을 새기니 그 절개 그 충성 영원하리라.'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대가로 잿더미가 되었다. 외적의 침입에 굴하지 않고 싸우고, 그리고 잿더미가 되는 일이 이처럼 되풀이 된 것이다.
연곡사의 이런 역사가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연곡사를 찾을 때는 섬진강변의 고전장 석주관도 함께 찾아보아야 한다. 연곡사와 석주관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연곡사의 잇단 병화와 승병을 일구어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던 스님들의 얼을 석주관과 함께 기억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또 이 사찰 경내에 있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도 연곡사의 정신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다.
연곡사의 부도들이 유별나게 아름답고 마치 살아숨쉬고 있는 듯한 생명감도 이런 질곡의 운명적인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