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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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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8월7일의 백무동 야영장 모습. 야영장을 뒤덮은 채 푸른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수목들이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드넓은 야영장에는 텐트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을 뿐 빈자리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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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9일, 노고단에선 기존의 40평 단층 슬라브 건물인 초라한 ‘노고단 산장’이 폐쇄되고, 바로 그 옆에 3층의 벽돌 건물인 ‘노고산장’이 개관됐다. 87년 5월에 착공한 이 산장은 3억1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건평 115평의 본관과 취사장, 화장실 등의 건물도 들어섰다. 난방과 샤워 등 현대시설을 갖춘 것은 물론이다.

새 노고산장은 ‘무장비 등산시대’를 선언하며 문을 여는 등 지리산 등산 역사의 새로운 장(章)을 열었다. 무장비 등산이란 자동차로 성삼재에 올라 맨몸으로 찾아오더라도 산장의 숙박은 물론, 야영생활도 즐길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산장에서 주부식을 파는 것은 물론이요,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대여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산장이 직영(?)한 야영장 규모는 무려 5000여 평의 방대한 면적이었다. 그러니까 ‘무장비 등산시대’의 개막을 선언할 만도 했다. 당시 장비 대여료는 텐트의 경우 1~3인용의 소형이 1000원, 4~9인용의 중형이 1400원, 10인용 이상의 대형이 2000원이었다. 또한 코펠과 버너, 담요 대여료도 각각 500원씩이었다.

하지만 이 ‘무장비 등산’은 1년도 못 가 무산이 되고 말았다. 장비를 대여하면 텐트는 태워먹기 일쑤이고, 코펠과 버너는 우그러뜨리거나 망가뜨리기 일쑤였다는 것. 산장 관리인들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했다. 새 노고단 산장에서 텐트며 취사도구를 빌려주겠다는 착상이야말로 물정 모르는 ‘의욕 과잉’이 아니었던가 한다.

새 노고단 산장이 문을 열 때 그에 딸린 야영장 규모가 5000여 평에 이르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야영장은 새 산장을 건립하면서 따로 조성한 것이 아니다. 기존 40평 단층 산장 시절에 야영객이 넘쳐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넘쳐나는 야영객들로 노고단의 산림이 그만큼 많이 잠식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디 노고단뿐이랴. 세석고원과 장터목, 벽소령, 화개재는 물론이요, 선비샘과 임걸령 샘터  등에도 야영에 따른 맨땅이 운동장처럼 넓혀졌다. 산장에서 야영장비를 대여하지 않아도 지리산 천지는 야영객으로 넘쳐났던 것이다. 옛 노고단 산장의 함태식, 세석 산장의 오진우 님 등이 ‘호랑이’로 불렸던 것도 ‘야영장 관리’ 때문이었다.

한여름철 노고단에는 야영장이 넘쳐나 군사작전도로까지 텐트가 넘쳐났고, 세석고원은 철쭉보다 더 화려한 원색텐트의 화원을 이루었다. 장터목에는 진주의 중고교 학생들이 단체로 야영 수련회를 여느라 법석을 이루기도 했다. 당시 주능선 유명 야영장들의 불야성은 통기타와 노래 소리와 함께 젊음과 낭만의 절정을 넘나들었다.

지리산 주능선, 천상의 화원에서 야영을 하는 멋과 낭만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당시에는 텐트와 취사도구 등 장비가 무겁고 불편했다. 간단한 인스턴트 식품의 개발도 초기단계였다. 석유와 알콜, 감자와 양파, 된장과 간장통을 메고 날라야 했던 시대였다. 고생이 심했던 만큼 야영의 재미도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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