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1980년대에 <우리들의 산>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산악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매월 <우리들의 산>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의 대부분은 지리산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이 모임이 어떻게 특이했으며, <우리들의 산> 책자가 어떠했는지는 이 시리즈 다음에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지리산 이야기를 많이 싣고 있는 산악회의 책이 매월 부산에서 펴내져 무가지로 전국에 뿌려지고 있는 것이 그 당시로는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물론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 산악인은 산악전문 월간지 <사람과 산>이 태어난 것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산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지리산 관련 글을 써온 이는 김경렬 옹이었다. 그이는 1960년대부터 부산일보 지면을 통해 ‘지리산 주능선 100리’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재했던 것. 특히 그이는 대륙산악회와 동아대산악회 등 부산의 산악인들과 지리산 칠선계곡 학술탐사대를 조직하여 몸으로 부딪친 생생한 현장 르포를 하고는 했다.
지리산 글을 누구보다 앞서 줄기차게 써왔던 김경렬 옹이 새로운 지리산 이야기들을 집중적으로 싣고 있는 <우리들의 산>이란 책자가 부산에서 펴내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들의 산> 발행 편집인 최화수가 1989년 봄부터 국제신문에 매일 <지리산 365일>을 연재하고 있었으니,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김경렬 옹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지리산 글을 신문에 연재하고, 산악회에서 잡지까지 펴내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얼굴 꼬락서니라도 보고 싶었을 터이다.
김 옹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우리들의 산’ 산악회와 최화수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런데 이게 어이 된 일이랴, 정체를 파악하여 발걸음이 닿고 보니 자신의 딸이 살고 있는 건물에 산악회가 세들어 있지 않겠는가. 최화수도 거기 있었으니….
김경렬 옹과 최화수의 해후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김 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미 노령으로 불편한 몸이었지만, 자신의 딸집에 세든 <우리들의 산>과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시작했다.
김 옹은 ‘우리들의 산 산행’에 참석, 지리산 현장 답사를 도와주었고, 필자와 그룹으로 지리산 곳곳을 찾기도 했다. 부산에선 산악회 주최의 산악강좌에 연사로 나서 지리산 이야기의 열강을 하고는 했다.
김경렬 옹은 무엇보다 <우리들의 산>에 지리산 관련 글 연재를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큐멘터리 지리산 1, 2>의 내용 가운데 수정 보완한 부분도 있고, 아주 새로 쓰는 글도 있었다.
김 옹은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 3>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일부를 <우리들의 산>에 연재한 것이다.
김 옹의 이 세 번째 책이 어떻게 되었는가?
‘월간 마운틴' 김선미 기자는 그 이야기를 앞에 든 글에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김경렬 옹의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이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른 한 편의 교향곡이라면 그것은 미완성이었다. 1, 2악장만 완성된 채 3악장은 초고 단계에서 작곡이 중단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처럼, 그는 <지리산의 전쟁과 평화>란 제목으로 엮으려고 했던 세 번째 책을 펴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