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재의 성문(城門)과 문패

by 최화수 posted Jul 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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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찾아드는 길의 하나로 오도재(悟道嶺)가 있다. 함양읍에서 마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인데, 해발 773미터 지점에 이 고개가 있다.
마천(가흥) 북쪽의 삼봉산(1186.7미터)과 휴천(문정) 북쪽의 법화산(911미터)이 서로 허리를 잔뜩 낮춰 만나는 곳에 절묘하게 자리한다.
오도재는 함양 쪽으로 20리 산길, 마천 쪽으로 20리 산길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다. 지난날 함양 마천 사람들이 장보러 다니는 삶의 길이기도 했다.

오도재라는 이름은 청매(靑梅) 인오(印悟, 1548~1623) 스님이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오도재에선 하봉에서 반야봉까지 지리산의 지붕 70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때문에 지난날에는 지리산을 찾는 함양의 관리들도 이 고갯길을 넘어갔다.
1472년 8월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김종직(金宗直)은 귀로에 오도재를 넘어왔고,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1489년 4월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 등정에 나섰다.

김일손은 이 등정을 <두류기행록>이란 글로 남겼는데, 오도재를 넘을 때의 기록이 재미있다.
[종자가 “말(馬)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고 했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도 살피지 않고 말을 채찍질하여 그냥 지나쳐버렸다...]
김일손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도착했다는데, 오도재 남쪽에 등구사 절터와 등구마을이 있다.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을 펴낸 부산의 언론인 김경렬 옹은 1987년 3월17일 함양읍을 출발하여 오도재를 찾는다.
김종직과 김일손이 500년 전에 넘었던 그 옛길을 다시 밟아보기 위해서였다.
김 옹은 지난날 제한역(蹄閑驛)이 있던 조동마을에서 지안재를 넘어 살구징이(월평리)에 이르렀는데, 한 사내가 길을 막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는 못가오, 못가. 길이 아니라카니, 여기가 어어디라고 온단 말이여?”

김 옹은 사내가 길을 가로막았던 까닭을 곧 알게 됐다.
[억새풀이 두 길이나 자라 길을 덮었고, 희미한 오솔길에는 나뭇가지가 제멋대로 뻗어 길을 가렸다.]
김 옹은 그래도 계속 걸어갔다.
[세 시간이 걸려서야 고갯마루에 올랐다. 아마 300년은 묵은 것 같은 고목 다섯 그루가 서 있고, 허물어진 돌담 안에 목이 없어진 석상 일좌(一坐)와 그 옆에 ‘悟道山神靈之神(오도산신령지신)’이라 새긴 돌비석이 나란히 있었다.]

김경렬 옹이 조동마을(제한역)에서 세 시간을 꼬박 걸어서 올랐던 오도재,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로 10여분이면 닿는다.
함양군은 김 옹이 걸어 올랐던 바로 그 다음 해인 1988년부터 15년의 역사(役事)를 벌인 끝에 2003년 11월30일 오도재를 넘는 2차선 관광 포장도로를 완공했다.
이 1023번 지방도로는 ‘지리산 가는 길’이란 별칭을 달고 있다. 500년 전의 김일손처럼, 지리산을 찾을 때는 이 길을 따라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도재를 넘는 관광도로가 열리면서 이 고개에는 대형 주차장과 전망광장이 마련됐고, 지득정(智得亭)과 관음정(觀音亭)이란 두 전망대도 만들었다.
이 높은 곳에 휴게실을 겸한 편의점이 생겨났고, 현대설비의 화장실까지 잘 만들어 놓았다. 특히 오도재에는 유별나게 많은 장승들이 마치 도열하듯 세워져 있다.

함양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도재에 성문(城門)을 세우고 있다.
이 성문과 성곽은 지난해 10월 공사를 시작했는데, 올 추석 이전에 마무리가 될 예정이다. 이 성문이 완공되면 '지리산 제1문(第一門)’이란 문패를 달게 된다. 높이 8미터, 너비 8미터의 전통양식인 성문과 90미터의 성곽 등의 공사비는 무려 15억원에 이른다. 성문 주위에 사당과 정자 등도 건립할 것이라고 한다.

오도재에서는 무엇보다 변강쇠와 옹녀의 체취가 물씬하다. 판소리 ‘가루지기 타령’을 근거로 그들이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는 것.
장승을 줄줄이 세워놓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오도재 주막 옆에 ‘옹녀샘’이 있고, 변강쇠와 옹녀 묘도 만들어놓았다.
이 묘 앞에는 최근에 변강쇠와 옹녀가 발가벗고 합일(合一)한 모습을 돌로 조각하여 세웠는데, 변강쇠의 거대한 성기가 그야말로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