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일기'(5)

by 최화수 posted Feb 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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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누가 씀바귀가 쓰다고 하는가!
                       (2월24일)

'쓴나물 데운 물이 고기도곤 맛이 있네
초옥(草屋) 좁은 줄이 긔 더욱 내 분이라.
다만당 임그린 탓으로 시름겨워 하노라.'-<鄭澈>

'한푼 두푼 돈나물 / 꾸부정 휘어 활나물 /
매끈매끈 기름나물 / 돌 돌 말아 고비나물 /
칭칭 감아 감돌레 / 집어뜯어 꽃다지 /
술마셨나 취나물 / 어렵살이 고사리 /
주지 말라 달래야 / 아따 춥다 냉이풀... '-<民謠>

'서로 미워하며 살진 쇠고기를 먹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舊約聖書-잠언>

'공자가 말하기를, 거친 밥을 먹고 냉수를
마시며 팔뚝 베고 잠자더라도 낙은 그
가운데 있는 것, 옳지 못한 부와 귀는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다.'-<論語 述而篇>

'누가 씀바귀가 쓰다고 하는가, 그 맛이 냉이처럼 단데...'-<詩經>

대포리에 먼저 정착한 직장 선배는 "산나물 캐는 게 일이제" 했다.
소주 한 병 꿰차고 부인과 산나물 캐러 가면 하루 운동이 돼서 좋다는 것이다.

"채마밭이 조금 있지만, 농사는 아예 생각 없어요."

자녀들을 대학 보내 취직도 하고 출가도 시켰으니 걱정될 일이 없단다.

"산나물에 소주 한 잔이면 세상이 내 것인데...뭐 거칠 것이 없다오."

거기다 날마다 부인의 청아한 웃음소리를 가까이 하니, 아쉽거나 부족할 것이 없다. 일찌기 고려 녹사 한유한(韓惟漢)과 남명 조식 선생도 오로지 빈손 맨몸으로 이 덕산의 지리산록에 찾아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산나물이 산골의 서정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부터 흉년과 외난이 끊임없이 겹쳐지는 가운데 이 나라를 그 기근에서 구해낸 것이 야생나물이었다. 산나물 들나물에 온 백성의 서정이 눈물과 함께 배어 있다.

나물은 우리 백성들이 많이 먹은 국민적 식품이었다. 산나물이 얼마나 서민생활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산나물타령'이 말해준다. 9살까지는 33가지 산나물 이름을 외워야만 했고, 99가지 나물을 식별할 줄 아는 것이 결혼조건이 되기도 했다.

지리산에 들면 가장 먼저 산나물과 친해지리라.
산나물 이름부터 익혀야 한다. 올 봄에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 산나물과 친해지는 것이다. 33가지는 못 되어도, 10가지 정도는 분명하게 익혀야 하겠다.

지리산과 산나물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또한 그것은 지리산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안겨주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