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일기'(52)

by 최화수 posted Nov 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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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무청과 '솔향'
               (11월6일)

"가을 가뭄으로 무가 못 생겼기는 하지만..."
지리산 왕등재와 왕산 사이의 잘룩한 안부  '쌍재'에서 땅과 씨름을 하고 있는 '공수' 석재규 내외가 무 한 다발을 안고 왔다. 부산대학병원에 문병을 가는 참에 우리 집을 찾은 것이다.
염소 돌보랴, 농사 지으랴, 등산로 개척하랴...너무 바쁘게 쫓기느라 '공수' 아우는 그만 무밭 물주기를 소홀히 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무는 가뭄을 심하게 탔는지 뿌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볼품이 없다.
하지만 무 뿌리가 어떠하든 그게 무슨 대수랴, 그 높은 쌍재에서 먼 길을 마다않고 손수 지은 농사라며 일부러 가져온 정이 고마운 것이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리산 최고의 오지(奧地), 카페 '오꿈사'(오지를 꿈꾸는 사람들)을 열고 오지의 삶을 열망하다 마침내 오지로 귀농한 '공수' 아우다.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무 뿌리가 아니라, 아주 파랗고 싱싱한 무청이었다. 사실 나는 그가 정작 '귀한 선물'로 가져온 홍시감보다 그 무청이 더 좋았다.
왕등재와 왕산 사이 쌍재의 고랭지 무, 청정한 솔숲에 둘러싸여 투명한 햇살, 파란 하늘만 바라보며 파랗고 싱싱하게 자란 무청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나는 이 세상의 먹거리 가운데 무청을 가장 좋아한다.
푸른 무청을 새끼 등으로 엮어 겨우내 말린 시래기, 그 시래기를 오래 푹 삶아 찬물에 우려낸 뒤 끓인 시래기국! 시래기와 된장을 버무린 시래기 나물, 시래기와 생선을 함께 졸인 시래기 조림은 또 얼마나 구수하고 부드럽고 맛이 특이한가.
시래기처럼 입맛을 돋아주는 반찬이 나에게는 따로 없다.  
  
시골에서 성장할 때 대청 위 시루나 처마 밑에는 짚으로 엮은 무청이 줄줄이 걸려 있고는 했다. 무청에서 풍겨나는 아주 독특한 냄새에 코를 벌럼거리고는 했다. 무청은 통풍이 잘 되고 그늘진 곳에서 말린다. 이렇게 말린 시래기는 잘 안 부스러지기 때문에 보관이 용이하다. 또한 영양성분이 우수하고 물의 흡수성도 좋다. 특히 비타민 B, C는 말린 후에도 손실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나는 '공수' 내외가 가져온 무청에 대한 특별한 감흥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지리산 무'와 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해발 1,000미터 문수암 도봉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이 무 한 뿌리였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청을 '공수' 내외가 안고 온 것도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인연에 따른 것이리라.

"형님이 무를 심어 무청을 거둬야 할 곳은 쌍재입니다. 나랑 함께 해요."
'공수' 아우는 무청 한 다발만 가져온 것만이 아니라,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나에게 던진다.
그는 또 아주 단정을 내린듯이 이렇게 말을 이었다.
"형님이 무청을 거둬야 할 곳은 지금 그곳이 아닙니다!"
내가 지리산에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지금 '지리산 오두막'을 추진하고 있는 그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맞아!"
나의 마음속에선 두 손으로 무릎을 쳤다.
그렇다, 그렇고 말고!
나는 그 생각을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지 않았던가!

'공수'가 살고 있는 쌍재와 우리 집은 수백리나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봄부터 그 수백리의 거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쌍재의 '공수네 집'이 우리집과 바로 이웃한 옆집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형님, 공숩니다!"
'공수'가 곧잘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때문만도 아니다.
'공수' 내외의 순수하고 순박한 품성이 쌍재의 풀꽃처럼 언제나 나의 가슴 한편에 자리하는 때문이다.
'공수' 내외는 겉모습이나 속마음이 저 파랗고 싱싱한 무청과도 같이 어떤 꾸밈도 없다. 쌍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청정한 홍송(紅松)처럼 가식이 없다.
그들에게서 저 싱그러운 '솔향'을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지리산 오두막'에 집착하면서 지리산 산행도 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쌍재의 무청'으로 청정한 '솔향'을 듬뿍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아, 죽도록 싫지 않은, 영원토록 은은한 '솔향'이여!
그런데, 참 이 세상의 인연이란 절묘한 듯하다.
이 며칠 사이, 나는 '솔향'에 대한 그 유례가 없는 감동을 엮고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