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일기'(56)

by 최화수 posted Dec 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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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입니다>

<37> 문수암 도봉 스님의 새 토굴(3)
                        (12월28일)

"자성(自省)을 못 깨치고 죽으면 죽음이다.
그런 생각에 통곡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공부의 진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죽을 사람이니 얼굴을 씻고 말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방은 냉기만 가시는 정도로 불은 조금만 때었습니다.
더우면 게으른 생각을 내기 때문입니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자기 다짐을 했던 대목이 법문집에 실려 있다.

"공부는 분심(忿心)이 있어야 한다.
산을 뽑아버릴 듯한 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다. 산을 뽑아버릴 듯한 그 분심이 없었다면,
어찌 찬바람이 끊임없이 뿜어져나오는 곳을 토굴로 삼았으며,
그 토굴서 홀로 20여년을 하루같이 정진할 수 있었겠는가.

지리산, 삼정산 정상 바로 아래, 해발 1,000미터의 문수암 토굴,
그 오랜 기간 홀로 정진을 해온 도봉 스님.
이제 당신의 입으로 '따뜻한 산아래'로 옮기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산아래' 라고는 하지만, 청암골, 청암저수지로 한 계류를 흘러내리는 골짜기,
저수지에서 무려 12㎞나 더 깊이 들어간다니, 이 또한 얼마나 깊은 '산중'인가.

아, 그 곳인가보다!
지난해 삼신산 기슭 '다오실'의 성락건님을 만났을 때 그이가 들려준 말이 있었다.
"내가 찾아들 수 있는 '마지막 산중'이 청암저수지 옆에 오직 하나 남아 있을 뿐인데...!"
그러지 않아도 도봉스님과 일행인 박 처사는 '다오실'을 찾았으나 성락건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도봉 스님은 함께 찾아온 박 처사를 나에게 자신의 '도반'이라고 소개했다.
그이는 도봉 스님과 함께 혜암 종정을 모시며 공부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환속했었다고 한다.
남해에서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박 처사, 하지만 그이는 자신의 길이 '산'임을 한시도 잊지 못 했다는 것.
그는 가산의 일부를 정리, 청암골에 절을 지어 도봉 스님과 노후를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처사는 절터를 구했을 뿐, 법당 등 불사를 하는 데는 재정적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장에는 어쩔 수 없어도, 불사를 도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라도 해야 하겠다.

2003년은 가을, 겨울로 기울면서 이상하게 큰스님들이 잇달아 입적했다.
'최고 행정승'인 정대 큰스님, 대선사 청화 큰스님, 우리 시대 최고 선지식 서옹 큰스님, 그리고 대종사 월하 큰스님...!
큰스님 한 분의 입적도 그렇거늘, 이렇게 여러 분이 잇달아 떠나시다니...!

'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
갈 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우리 모두 꿈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

정대 큰스님의 임종게가 귓가에 메아리진다.

내일 모레면 2004년 새해이다.
내년 여름까지 문수암 도봉 스님이 청암골로 거처를 옮긴단다.
'초파일 문수암 가기'도 마침내 내년으로 끝날 모양이다.
삼정산 대신 새로 찾게 될 청암골이 눈앞에 환하게 그려진다.

..................................

'지리산 일기'는 일단 여기서 끝납니다.
두루두루 나눌 화제도 못 되는 것을...!
내용도 없이 그냥 독백하듯 읊었습니다.
읽어주신 분에게 거듭 머리를 숙입니다.
또 '지리산 일기'를 쓸는지도 모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