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지리산, 사랑의 지리산'(94)

by 최화수 posted Jan 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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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봉명산방 그리고 왕증장(6)

내가 초막으로 되돌아나와 나무의자에 주저앉아 있자니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남자가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처음 대하는 나에게 갈근차를 내주면서 친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긋나긋하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이의 부인은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아니했고, 또 초면에 그의 부인에 관해 뭘 물어볼 수도 없었다.

쌍계사로 돌아올 때는 하늘이 쾌청했다. 얼마나 맑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지 등산로의 눈이 금방 녹아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눈과 마음이 맑아지기는 커녕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쌍계사로 내려선 뒤에도 마음에 채워지는 것이 없어, 나는 다시 지리산 더 깊은 골 의신마을로 간 뒤 벽소령으로 오르는 길을 미친놈처럼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불일평전의 바로 그이, 변규화 선생의 일부분이나마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90년 늦가을이었다. 그 날은 평일이었다. 나는 이광전 엄수평님과 함께 아침에 부산을 출발, 청학동에 들러 그곳 사람들과 청학동의 개방과 폐쇄 문제로 한동안 입씨름을 벌인 끝에 불일폭포로 넘어온 것이다.

청학동에선 삼신봉으로 올라 외삼신봉~내삼신봉~쇠통바위~상불재를 거쳐 사위가 잔뜩 어두워진 시각에 불일폭포에 닿았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이광전 선생의 랜턴 도움을 받아 묘한 비석이 섰던 자리를 찾고자 했다. 폭포의 물길을 바꾸게 하고, 드나드는 길을 넓히게 한 하동군수의 공로를 치하하여 세운 말썽 많았던 비석이었다.

'한 아무개 폭포환경정리비'는 1964년 치마폭 같이 펼쳐져 내리던 폭포 상단을 정으로 쪼아내 직선으로 떨어지게 한 기념비라고 한다. 또다른 '허 아무개 기념사업비'는 얼마 안 되는 벼랑길을 다듬은 기념비라고 한다. 사업비보다 비석값이 더 들었을 성 싶은 이 비는 아부하기 좋아하는 일부 부하들이 세운 것이라는 비판글도 있었다.

그 비석들은 자연의 원형을 파괴했다는 비난 여론에 밀려 다시 뽑혀나갔다. 나는 그 비석이 뽑혀져 나간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둠이 겹겹이 쌓여 있는 백길 벼랑 폭포 아래에서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난 때문이다. 그는 변 선생의 일을 도우며 '공부'(?) 한다는 청년으로 부산의 금정산에서 옮겨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