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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추억의지리산,사랑의지리산(최화수)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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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래봉 풀밭에서 길을 잃다(2)

지난 9월29일 카페 '내사랑 지리산'의 창립기념산행이 있었다. 하루 앞날 저녁 새재마을의 한 산장에 집결하여 참가자들이 차례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런데 한 분이 아주 정색을 하고 조개골~치밭목 구간에서 길을 잃었던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가보면 길이 아니고, 또 가보면 길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체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불현듯 바래봉 풀밭에서 길을 잃었던 그 때의 일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바래봉 풀밭이란 운봉목장에서 목초지로 가꿔놓은 것인데, 아주 편편한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또한 방목 면양을 보호하기 위해 철조망까지 쳐놓았기 때문에 길을 잃고자 해도 잃을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서 조난 위기에까지 몰렸을까?

그 날은 사월초파일로 5월 하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여름이었기 때문에 실비가 뿌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서북능선에 올라서자 운무가 뒤덮고 있는데도 강풍이 몰아쳤다. 빗줄기도 점차 굵어져 비옷이 허술했던 나는 당장 속옷까지 젖고 말았다. 초여름에 이렇게 덜덜 떨다니! 하지만 나 혼자만 추위를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입술이 파랗게 얼어들고 있었다. 체온 유지가 문제가 되면서 바래봉 철쭉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바래봉의 감시초소까지 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됐다. 그곳에는 맑은 물의 샘터가 있고, 버너를 피워 따뜻한 음식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지척에 있을 듯한 그 바래봉 감시초소가 이상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자이언트' 이광전님이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먼저 깨달았다. 그이는 우리들을 작은 바위 뒤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혼자 길을 찾아 나섰다. 동쪽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쪽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다. 그이는 철조망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그런데 바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니 그이가 360도 원을 그리며 풀밭을 뱅뱅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하의 지리산꾼 이광전님이 맴을 돌고 있는 것이 나에겐 불가사의라기보다 어떤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적당히 백코스, 비상탈출하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결국 운봉목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치밭목대피소 민병태님도 이 얘기를 듣고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산에서 길을 잃는 것은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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