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5미터 사이에 끼어든 '사랑'(3)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집으로 찾아와 느닷없이 흐느껴 우는 그녀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내게 전후사정을 물어볼 틈조차 주지 않고 그녀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딸녀석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녀가 한동안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뒤 전후사정 얘기를 들어보고자 하였다.

그녀는 언젠가 왕시루봉에서 하산할 때 철쭉꽃밭에 들어가 산악회 총각 Y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이 있었다. 언제나 나와 5미터의 거리를 유지했던 그녀의 돌출행동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은 Y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나의 짐작은 맞았다. 그녀는 그와 철쭉밭에서 사진만 찍은 것이 아니었다.

"결혼하기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까지 마쳤는데, 그가 갑자기 다른 핑계를 대며 발뺌을 하는 거예요. 어쩌면 좋지요?" "아니, 어쩌면 좋겠냐고 묻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나 쪽이다. 자네는 나와 5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는 줄 알았는데, 어느 사이에 그 녀석과 결혼 약속까지 했다는 건지, 내가 어안이 벙벙하다. 자네들 속전속결도 좋지만, 나에게까지 감쪽같이 속이다니!"

그녀는 Y가 첫 남자라고 했다. 그 때까지 남자 친구도 없었고, 더구나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철쭉꽃밭 이전에 그와 차를 몇 차례 마셨다고 했다. 산행이 끝나고 헤어진 뒤 집으로 가는 길목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Y가 진실하고 친절한 것에 마음이 끌렸고, 벼락 청혼을 받고 고민하다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은 언니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부모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 언니라고 했다. 양가 부모에게 인사를 밟는 절차도 언니가 주선했다고 한다. 그런데 Y가 갑자기 결혼할 형편이 안 되니까 없던 일로 하자며 절교선언을 한 것이다. 어느날 사랑의 열정에 휘말렸던 순진무구한 그녀의 충격이 얼마나 엄청났겠는가.

그의 마음을 돌려달라는 그녀의 부탁이 아주 절절했지만, 사랑의 그 미묘한 세계를 제3자가 무슨 재주로 밀고 당기고 하겠는가. 나는 Y를 만나 야단도 치고 달래도 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벌써 십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도 그도 지금은 따로 따로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아직도 아쉬움이 따르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