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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리마당>추억의지리산,사랑의지리산(최화수)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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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풍의 바다에 익사하다(3)

노고단에서 단풍의 바다에 빠져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히히덕거렸던 댓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아니 지리산이 어떤 산인데 그렇게 무모하게 아무런 채비도 갖추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을 인솔하다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황당한 것이었다. 입이 열 개 아니라 스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노고단에서 화엄사로 내려오는 길에 어둠속에 조난된 우리 일행을 위해 서어나무야영장까지 달려가 랜턴을 빌려온 이아무개양은 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나는 눈길 한 번 주어본 일조차 없었다. 그녀가 우리 산행 팀의 일원인 것도 소동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알았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고보니 그녀만큼 이쁜 여성이 또 없었다.

그녀는 말을 다소 퉁명스럽게 했다. 그런 말씨마저 우리 일행을 구해줄 수 있는 여성의 독특한 매력으로 생각됐다. 그녀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우리들의 산행에 동행했다. 물론 무료초대 회원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 1년 뒤 이 산악회가 해체되고 다른 산악회가 탄생하면서 그녀의 평생무료 회원 특혜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날 화엄사 여관촌의 밤은 늦도록 뜨겁고 즐거운 시간으로 이어졌다. 어둠속에 조난당했을 때 욕지꺼리를 퍼붓던 사람들도 전원 무사히 귀환하게 되자 고생했던 것을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며 서로 앞다투어 떠들어댔다. 누군가가 아주 독특한 해석을 내렸다. "우리 모두 단풍에 익사한 거야. 아주 행복한 추억 만들기를 한 거야!"

다음날 아침, 천은사로 가는 대절버스 안에서였다. 운전석 옆에 있던 한 중앙지를 훑어보던 나는 일순간 머리가 띵했다. 히말라야 파빌봉에 도전한 부산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했다는 짧막한 기사였다. 그 원정대에 신문사의 한 선배가 동행을 하고 있었다. 등정 성공과 함께 그 기사를 본사의 내가 작성, 1면 머릿기사로 싣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등산 담당기자인 나는 회사를 무단 결근, 지리산 단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으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등정 관련 자료도 나의 책상 서랍에 있었다. 회사에선 난리법석이 벌어질 것이다. 아, 천은사 단풍이 너무 아름답다고들 했지만, 나의 눈에는 비춰지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단풍에 빠져 익사한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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