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지리산, 사랑의 지리산(35)

by 최화수 posted Sep 0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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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름소설학교의 '강구 사건'

부산소설가협회가 매년 여름철에 '여름소설학교'를 열어오고 있는 것은 어언 20여년의 성상을 기록했다. 첫 소설학교는 부산의 양대 거봉인 작가 이주홍, 김정한님을 모시고 동해남부의 작고 아름다운 대변해수욕장에서 열렸다. 그 다음 해부터는 이 여름소설학교가 대체로 지리산의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개최되었다.

백무동, 피아골, 화개동천 등을 차례로 돌아가면서 열린 이 학교의 장소 선정 임무가 나에게 맡겨질 때가 많았다. 80년대 중반 어느 해 여름소설학교가 청학동 아랫마을인 묵계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이 학교는 급식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고,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피서객도 거의 없어 아주 조용하고 이상적이었다.

낮 시간에는 기성작가들의 소설 창작 강의를 듣고, 삼신봉 산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저녁 시간에는 그룹별로 토론회를 가졌는데, 묵계 계곡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소설 얘기나 지리산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 토론장에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취흥이 돋으면 아주 열변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K씨(현재 부경대 교수)가 학생들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면서 "강구"(바퀴벌레)라는 말을 했다. 때마침 작가 윤정규씨가 거나하게 취한 채 그곳을 지나치다 그 말을 들었다. "뭐, 나를 강구라고!?" 그이는 자신을 '바퀴벌레'로 욕하는 것으로 착각, 불같이 화를 냈다. 술에 취해 있었으니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았다.

윤정규씨는 그냥 넘길 수 없다며 큰 몽둥이를 들고 왔다. K씨는 가만 앉아있다가는 몽둥이 세례를 당할 것 같으니 일단 도망을 쳤다. 하지만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우니 어디로 도망칠 수가 있겠는가. K씨는 응겁결에 묵계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달아났고, 윤정규씨 또한 K씨를 쫓는다며 역시 그 운동장으로 뒤따라 달려갔다.

한여름밤에 두 사나이가 운동장을 돌며 쫓고 쫓기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했으니 디뚱디뚱 달려가는 모양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이것이 여름소설학교의 '강구 사건'이다. 술이 깨면 금세 잊고마는 사람 좋은 윤정규씨, 그이가 며칠 전 지리산 추억을 안은 채 영면했다. 슬픔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