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지리산, 사랑의 지리산'(43)

by 최화수 posted Sep 0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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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류시인이 산길을 내려올 때

'노고단 호랑이' 함태식님이 피아골산장으로 밀려난 뒤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왕시루봉 외국인수양촌 '왕증장'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함태식님과 가까이 지낸 '자이언트' 이광전님이 수양촌의 집 한 동을 사용하게 되어 나는 이래저래 그곳에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룹으로 그곳에 다녀올 때의 한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구산리에서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는 그 날따라 철쭉꽃이 지천으로 피어나 있었다. 어쩌면 그토록 많은 철쭉꽃이 무리 지어 피어났는지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산길의 우리 일행은 끼리끼리 어울려 철쭉밭에서 사진을 찍거나 장난을 치면서 요란하게 떠들었다. 지리산길을 시끌벅적하게 내려온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오는 어느 사이에 나만 홀로 남았다. 일행이 뒤로 처졌는지, 앞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혼자 아무 소리도 않고 걷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나는 서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렇게 얼마쯤 내려오는데 혼자 배낭을 멘 채 철쭉밭에 시선을 던져두고 서 있는 이가 있었다.

여류시인 아무개였다. 그녀는 결혼한 지 10년도 넘은 주부인데도 소녀처럼 수줍음이 많았다. 철쭉꽃밭을 지켜보며 시상(詩想)을 가다듬는지 내가 다가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가 서 있는 동안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냥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 뒤 그녀는 또 시선을 철쭉꽃밭에 던져두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나도 그녀에게 더 이상 접근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녀가 걸으면 나도 걷고, 그녀가 멈춰서게 되면 나도 따라서 멈춰서고, 그러기를 몇 차례나 거푸 되풀이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는 그 산길을 거의 다 내려올 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뒤따라가던 나를 끝까지 알아보지 못 했다. 그녀는 시상을 가다듬는데 아주 몰입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녀 덕분에 나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조심조심 그 산길을 내려왔다. 십수년 전의 그 해프닝이 요즘 들어와선 무슨 그리움처럼 불쑥불쑥 떠오르고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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