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지리산, 사랑의 지리산'(97)

by 최화수 posted Jan 3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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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봉명산방 그리고 왕증장(9)

나는 '나무 자지'를 만들어놓은 함태식 선생의 그 천진함이 너무 좋았다. 나는 쪽박을 받아들고 내 손으로 또 한번 나무 자지 끝에 내밀어 달고 시원한 무을 받아마셨다. 함 선생은 다시 나를 숨돌릴 겨를도 없이 왕증장의 부엌으로 끌고 갔다. 좁은 부엌 바닥에선 함 선생의 일을 돕고 있다는 여성 산악인 한 명이 취나물을 버무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산>에서 당신이랑 여기에 온다는 연락을 받고, 아침에 부드러운 취나물을 일부러 뜯은 거야. 자 이 산나물로 소주 한 잔씩!" "캬아!" 나는 그 됫병의 소주 맛과 된장으로 버무린 취나물의 상큼한 향기를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좋으리오! 함 선생과 나는 취나물과 소주잔을 서로 주고 받았다.

함 선생과 나는 취나물을 버무리고 있는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광전 선생이 나머지 일행을 이끌고 닿기 전에 한 잔이라도 더 많이 마시자며 "캬아!" "캬아!"를 거푸 되풀이했다. 밥과 소주와 취나물로 점심식사를 실컷 한 뒤 우리들은 함 선생의 안내로 '외국인선교사 수양관'(일명 외국인 별장촌)을 한 바퀴 돌면서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쇠통을 따고 들어가본 목조 오두막 내부는 그 과학적인 구조에 먼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채광 환풍 방음 방풍 설계는 물론, 전형적인 서양식 내부 구조가 주변의 아름다운 숲과 어울려 아주 인상적이었다. "최 선생, 애인 한번 데리고 오시라구요. 이 건물 한 채는 내 몫이니까, 여기서 묵게끔 특별배려를 해줄 테니, 데려 오시라구요!"

"그러지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있을 거예요." 나는 별장촌을 둘러본 뒤 혼자 한동안 멍청히 푸른 숲속에 잠겨 있었다. 변규화 선생, 그는 20년을 혼자 지리산속에서 살고 있다. 함태식 선생, 그도 20년을 혼자 이 지리산의 깊고 깊은 자연세계에 묻혀 살고 있다. 이 높고 높은, 또 깊고 깊은 지리산속의 자연세계에서 혼자 살고 있는 두 분이다.

산처럼 높고, 또 깊은 그들의 내면세계를 내가 어찌 재대로 엿보기나 하겠는가. 함 선생이 머물고 있는 왕증장의 문턱에는 '無碍人'(무애인)이란 글이 걸려 있었다. '一道出生死 一切無碍人'(일도출생사 일절무애인).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나고 살고 죽는 것이 하나의 길이다는 뜻이다. 아무 것에도 거리낌 없는 자유인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