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기념관'에 가면...(6)

by 최화수 posted Dec 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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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에는 중산리나 유평리 쪽에서 천왕봉을 오를 경우 산천재나 덕천서원 앞을 반드시 지나가야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덕천강 건너편으로 새로 생겨난 4차선의 직선도로가 중산리로 바로 내달리지요.
또 삼신봉 터널이 중산리에서 하동 쪽으로 지름길을 내놓았고요.

산천재나 덕천서원 앞을 거쳐가야 할 때도 무심하게 지나친 이들이 더 많았었지요.
이제 따로 가는 찻길도 뚫렸으니, 산천재 등 남명 유적지가 더 외로울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때맞춰 남명기념관이 세워져 일부러 이곳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어요.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들러, 남명의 체취나 정신을 안고 간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배고픔을 견디려면 배고픔을 잊어야 할뿐
도무지 산 목숨 쉴 곳도 없네
집주인은 잠만 자고 구해올 줄 모르는데
푸른산 짙은 곳에 시내만 어둠에 흐르네'

남명 선생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그이의 시(詩)예요.
남명의 학문은 따로 두더라도, 그이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입니다.
그이는 38세 때 '6품관(헌릉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했다지요.
또 52세 때는 '전생서 주부', 53세 때 '사도사 주부', 55세 때 '단성현감', 66세 때 '상서원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한결같이 사양했다지 않습니까.

남명은 고향인 합천 삼가에 토지와 집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이는 그 모두를 버려둔 채 빈 몸으로 지리산에 귀의했던 것이에요.
그이의 청빈낙도는 어떠한 벼슬도 마다하고 산림처사로 일관했던 것에서도 능히 짐작이 됩니다.
남명이 벼슬을 마다하고 물질을 멀리한 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만인의 정신적 사표가 된다고 하겠네요.

남명 선생이 지리산 덕산에 산천재를 열고 어렵게 살던 만년의 일입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청도(淸道)에 살던 김대유(金大有)라는 이가 있었지요.
그이는 가난하게 사는 남명에게 늘 좁쌀을 보내주었답니다.
김대유는 명종 7년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는데, "내가 죽은 뒤에도 남명에게 식량을 꼭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그러나 남명은 김대유의 유명(遺命)으로 보내오는 그 곡식을 사양했답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가난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바른길이다!"
이 한 마디에도 남명의 고고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겠네요.
그이는 자신의 의지로는 어떠한 벼슬이나 재물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타계한 뒤에는 제자들에 의해 영의정에 추서되기도 했지요.

남명과 어릴 때 함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된 성운(成運)이란 분이 있지요.
그이는 남명의 '묘갈문(墓喝文)'에 다음과 같이 썼답니다.
'슬프다. 공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그와 견줄만한 이가 드물다.
또한 어진 이에 추배(追配)하여 후학들의 종사(宗師)로 삼을만 하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함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성운은 그러나 이어 다음과 같이 자문(自問)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어찌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리오!"
그렇습니다. 남명이 어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기나 했겠습니까.
그래도 성운은 '묘갈문'에 간곡하게 이렇게 덧붙여 썼답니다.
'백세 먼 뒷날, 아는 이가 나와주기를 기다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