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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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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지리산 변방의 이 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얼마만한 무게로 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첩(大捷)'이란 이름이 시사하듯이 이는 왜구의 우리나라 침탈 만행에 치명타를 날려 쐐기를 박은 것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황산대첩은 세계 해전사(海戰史)를 바꾼, 함선에 함포를 장착한 '과학 전쟁'과 그 뿌리를 함께 합니다.
또 있어요.
이성계(李成桂)에게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원동력을 준 것이지요.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만약 황산전투에서 이성계가 왜구에 패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선 500년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황산대첩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꿈도 꾸지 못 했을 것이에요.

황산대첩, 거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보입니다.
그것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는 획기적인 전환의 시기이지요.
또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인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갈등, 그 과정의 적나라한 면면도 엿볼 수 있습니다.

황산대첩을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요.
황산(荒山)이 위치한 운봉고원의 지리와 역사적 발자취입니다.
운봉의 옛 이름은 운성으로 예부터 학문과 절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합니다.
이 지방의 큰 자랑은 '동편제 탯자리'인데, 가왕(歌王) 송흥록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창들을 배출해냈어요.  

운봉은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바래봉 철쭉의 화원처럼 전원 풍광이 평화롭고 아릅답지요.
국내 최초의 면양시범단지가 들어섰을 만큼 고원 일대는 드넓은 들판이 목가적 풍취를 자아냅니다.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말이 운봉고원과 너무 잘 어울리는 거에요.

하지만 운봉의 역사적 운명은 결코 순탄치가 않습니다.
운봉은 예부터 천연 요새로서 전략요충지로 이용됐어요.
운봉을 장악하면 삼남을 장악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삼한시대부터 이곳에서 곧잘 벌어진 전투는 근대의 빨치산과 토벌군경 격전까지 이어졌답니다.

원래 남원은 백제 땅이었고, 운봉은 신라 땅이었어요.
운봉은 특히 백제와 신라가 서로 산성을 쌓아 대치하던 국경지대였습니다.
백제는 초고왕 23년(188년)과 무왕 3년(602년), 무왕 17년(616년)에 각각 신라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했고, 백제 동성왕 6년(신라 소지왕 6년, 484년)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모산성 아래에서 격퇴시키기도 했어요.

운봉의 서쪽은 아흔아홉 고비의 유명한 여원치(女院峙)가 자리합니다.
남원에서 동북쪽으로 10킬로미터, 해발 485미터로 이곳에서부터 운봉고원이 열립니다.
여원치에는 암벽에 왼쪽 젖가슴이 잘린 여신상이 새겨져 있을 만큼 절절한 사연이 많아요.
황산대첩을 이끈 이성계도 이곳에서 결정적 현몽을 꾸게 됩니다.

운봉 동쪽은 인월(引月)이지요.
황산대첩을 위해 이성계가 그뭄밤에 보름달을 끌어올려 전투를 했다고도 하고, 또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달을 중천에 끌어다 매어놓고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 전설이 있지요.
그래서 마을 이름도 달을 끌어당겼다는 뜻의 인월인데, 예부터 함양과 남원의 군사기지로서 막중한 역할을 한 곳입니다.

운봉 벌판을 적시며 흐르는 만수천은 인월을 거쳐 실상사 앞으로 흘러듭니다.
이 만수천이 뱀사골 등에서 흘러내리는 지리산 계수와 합쳐져 임천이 되고, 다시 엄천, 엄천강, 남강,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흘러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날 왜구는 이 물줄기를 배를 타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 실상사 앞까지 진출했다고 합니다.

지리산 실상사는 왜구와 격전을 벌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실상사에는 일본을 누르는 풍수전설이 많이 전해오기도 하지요.
'부연폭포의 솥'에 얽힌 이야기도 그 하나입니다.
이 실상사도 운봉과 지척간의 거리입니다.
운봉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알게 해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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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규 2005.01.21 23:33
    지리산의 이야기는 끝이 없군요. 많은 사연과 애환과 우리의 역사가 함께 했으니 말입니다. 흥부전, 변강쇠이야기, 빨치산, 무릉도원, 성모상,이성계와 조선건국, 한남군이야기,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설등등 모두 흥미로우면서 새삼스럽게 알아야 할것도 많고 재미가 솔솔 흘러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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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 2005.01.22 13:10
    지리산을 통하여 배우는 역사 그리고 예술...철학...지리...
    하나 하나 새로운것을 알아가는 삶...정말 가치있는 시간입니다
    여산선생님의 글을 뵈오며 지리산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렇게 자상하게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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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석일 2005.03.16 22:03
    고려국에 충성을 다한 변안열 공

    대은(大隱). 변안렬은 본래 선양[瀋陽]사람. 원나라 말기 병란(兵亂)으로 선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본관을 원주(原州)로 하사받았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시켜 2등공신에 책록, 소부감판사에 올랐다.

    이듬해 서울을 수복하여 1등공신에 책록,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진되면서 추성보조(推誠輔祚)공신의 호를 받았다.

    밀직사판사로 최영(崔瑩)과 함께 제주도를 정벌, 문하부지사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推忠亮節宣威翊贊) 공신의 호를 받은 뒤, 양광 ·전라도도지휘사 겸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문하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어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왜구 퇴치에 공을 세워,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에 봉해지고, 삼사판사 ·삼사영사(領事)에 이르렀다.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 복위를 모의한 일이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 ·사형되었다.

    아래 비는 공이 화를 당하시고 돌아 가신지 181년 후에 그의 후손이 1571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6대 외손 황해도관찰사 박승임(朴承任)이 찬하고, 7대 외손 송인에 의하여 쓰여진 비문내용이다.


    “高麗國推忠亮節宣威翊贊補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三司事原川府院君邊公墓表 "


    시조 대은 변안열 선생 신도비문

    원주부원군 대은 변공은 위대한 분으로서 포은 정선생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그 행적과 충절이 정선생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그에 대한 국가의 공훈 포상이 달랐을 뿐이다.

    공의 휘는 안열이며 자는 충가이다.
    변씨의 성은 본래 자(子)씨 였으니 중국 은나라 징중의 후손이다.


    징중은 송나라에 봉하여졌는데 그 후손인 평공의 아들 어융의 자가 자변이므로 그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아 변씨가 된 것이다.

    대대로 룽서에 살다가 송나라말엽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취성 지영의 황주에 옮겨왔으므로 황주변씨가 이에 비롯되었다.


    고려 고종때 려는 공로가 있어 태천백에 봉하여졌고 뒤에 윤은 안찰사, 아들 유는 의랑, 아들 제는 검교, 아들 눌은 판사, 아들 석은 통례의 벼슬을 각각 지냈으며

    그의 아우 순은 원나라에 벼슬하여 심양후에 봉하여졌고 고려에서는 그분에게 찬성사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조부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량이며 심양후에 봉하여졌고 고려에서는 그분에게 판삼사사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모는 곽씨인데 서기1334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지조가 맑고 높으며 국량이 넓고크며 문장에 능통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1351년에 호접에 수석으로 뽑혀 빛나는 관직을 역임하여 형부상서에 올랐다.


    그해 겨울 로국공주가 고려 강릉대군에게 시집올때 부장으로서 공주를 모시고 우리나라에 왔다.
    1352년에 강릉대군이 왕위에 올라 공민왕이 되었다.


    왕은 외숙인 판추밀 원 의 의 딸에게 공을 장가들게 했는데 원(元)씨의 본관이 원주이므로 왕은 공의 본관을 원주로 내리셨다.



    이로써 공은 원주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은 1362년에 안우와 함께 홍건적을 몰아내고 이등공신이되어 판사부감사에 임명되었고 서울을 수복하자 일등공신이되어 예의판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補祚功臣)칭호를 받았고 또 총의용우군이 되었다


    뒷해에는 양광도 전라도 도지휘사겸조전원사가 되어 조사민과 함께 부녕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개선할때 대신들이 천수사에서 탈춤놀이 연회를 베풀고 환영함과 동시에 백금일정과 안장낀말과 옷등을 하사받았고 또한 문하찬성사에 승진하였다.


    1377년에는 경기도 도총사가되어 수원 양성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조전원사로 이성계와 함께 해주에서 왜적을 물리쳤으며 최영과 함께 해평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1380년에 왜적이 대거침입하여 백성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하니 공은 도체찰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운봉일월역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왕은 최영으로 하여금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문앞에 환영문을 설치하여 영접케하고 공과 이성계에게 각기 금50냥을 내리셨다.


    1382년에 왜병이 크게 침입하자 공이 도원사가 되어 한방언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많이 사로잡았다.
    또한 안동에서 왜병을 무찔러 그공으로 원주부원군에 봉하고 판삼사사에 올랐다.


    1388년에 이성계와 함께 요동을 치러가다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켰다.


    이성계가 여러장수들과 더불어 우왕을 강화도로 추방하려는 의논을 하게되자 공은 드디어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 호를 대은이라불렀다.



    이색의 의견을 따라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우왕이 여흥으로 옮겨지자 공은 몰래 우왕을 찾아가 다시 왕으로 맞아들일것을 의논하였다.


    1389년에 영삼사사에 승진하니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고 조정에서 명망이 매우 높아 졌다.
    어느날 김저가 밤중에 이성계의 집에 이르러 그를 해치려다가 도리어 붙잡혀 사헌부에서 심한 문초에도 입을 열지 않으므로 칼로 발바닥을 찢고 불로 지저대니 묻는대로 응하게 되어 그 화가 공에게까지 미쳐 공은 죄인의 몸이 되었다.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창왕은 강화로 내쫓겼으며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1390년에 윤소종과 이첨이 죄를 논하여 공을 처형하도록 왕에게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한양으로 귀향보냈다.



    때마침 강도가 성문밖에서 사람을 납치해간 사건이 있었는데 윤소종일파들은 당나라 역적 오원제가 자객을 보내어 무원형대신을 죽인 고사를 인용하여 이 강도사건은 안열이 일으켰다고 고하고 그 후 5회에 걸쳐 죄를 꾸며 상소하였다.

    특히 성석린은 공은 대역죄로 몰고 처형할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왕은 사헌부에 명령하여 유소에서 문초하지말고 처형하라고 하명하니 도평리사가 심문도하지않고 대신을 극형에 처함은 부가하다고 하므로 왕은 오사충과 남재로 하여금 문초케 하였다.


    그들이 벽제역에 이르러보니 공은 이미 화를 당한 뒤였다.


    그날이 바로 1390년 정월 십육일이다.

    그해 여름 공은 위화도 회군의 공신으로 기록하고 왕의 교문으로 변안열의 몸은 이미 죽었으나 의리를 옳케가려 회군한 공은 길이 잊을수 없다고 하였다.


    1391년에 녹권을 주었다가 다시 공훈을 소제하고 가산을 침수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등극하자 관직과 재산을 돌려주었다.


    공은 양주 주엽산에 의관장으로 모셨으나 1468년 광릉에 가깝다하여 풍양 건천면 지사동 인좌로 이묘했다.


    공이 읊은 불굴가는 다음과 같다.


    가슴팍 구멍뚫어 동아줄로 마구꿰어
    앞뒤로 끌고당겨 갈켜지고 쓸릴망정
    임향한 그 굳은뜻을 내뉘라고 굽히랴


    포은 정몽주는 공의 전기를 지으면서 "예로부터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하늘이 반드시 충신열사를 보내어 힘을 다해 외적을 막고 혹은 절개를 다하여 구국함으로서 신하의 사표가 된이가 없지 않으나 한사람이 몸으로 이 두가지를 겸한 사람은 고금을 통하여 안열같은 충신은 드물다." 라고 하였고 그 제문에서 이르기를 "름름한 가을 서리는 공의 충열이요 열열한 저 태양빛은 공의 절개로다."하였으며


    목은 이색이 지은 제문에서는 "고금천지에 신하로서의 기강을 바로세운이가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자손만세의 의사들을 격려한 이가 공이 아니고 누구인고 저 한강수는 유유히 흘러 그칠줄 모르고 저 삼각산은 우뚝솟아 푸른빛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이 강산과 더불어 변하지 않은것은 공의 충열이 아니고 무엇일까." 라고 하였고 야은 길재는 제문에서 "지극한 충성이요 위대한 절개라."고 하였다.


    오랜세월이 흘러 공의 높은 행적과 구국한 절개를 자세히 알수없으나 이 삼은선생의 글만 보아도 그충절이 대략을 알수 있어 다시 보탤것이 없지만 공의 행적과 충절은 포은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혁명기인 사변때 사람들은 옳케 전하지 못하고 역사를 바르게 기록할수 없었던 까닭으로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집함에 있어 도리어 공을 간신배의 대열에 넣어 서술했으니 이것이 어찌 믿을수 있는 사학가라 하겠는가?






  • ?
    변석일 2007.05.01 13:12
    윤종일 교수의 '남양주 역사기행(24)'- 일월상도(日月象圖)의 의미(意味)








    ▲ 변안렬 묘비(邊安烈 墓碑)(남양주시 용정리)

    글. 임병규(남양주향토사료관 관장)

    우리 남양주시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드문 석비(石碑) 삼기(三基)가 있으니 우리 시의 자랑은 물론이려니와 미술사(美術史)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볼 때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변안열(邊安烈 : 1334~1390) 선생은 원주 변씨 시조이며, 고려말 충신으로서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올랐고, 조선 개국 때 우왕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한 분으로 그때 부른 「불굴가(不屈歌)」는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와 함께 유명하다. 1571년 세운 변안렬의 묘표는 신도비에 해당되는 크기이며 특이한 것은 앞면에 일상문(삼족오)을 뒷면에 월상문(옥토)을 넣은 것인데 그 반대로 조식하였다. 아마도 세상이 뒤바뀐(고려에서 조선으로) 현실을 뒤집어 표현하므로서 충신의 뜻을 대변한듯하다.

    정미수(鄭眉壽 : 1456~1512) 선생은 해주인(海州人)으로 문종의 따님이요, 단종의 누님이신 경혜공주(敬惠公主)와 정종(鄭悰) 사이의 아드님으로서 운명이 기구하여 아버지는 단종복위에 연루되어 사사되고 세조가 데려다 길렀다. 그에 대한 글은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쓰기로 하고, 묘표에 조각된 문양이 표면엔 용(龍) 머리를, 이면엔 옥토(玉兎)를 조식하였다.

    박운(朴雲 : 1493~1562) 선생은 순천인(順天人)으로 도곡리 금대산 양지 바른 자락에 중종반정의 주역이며 영의정에 오른 박원종(朴元宗)의 묘역 안에 있으니 일월도(日月圖)가 선명하다. 특히 삼족오의 새는 세 발이 뚜렷하고 현대 감각에도 어울리는 세련된 조각이 돋보인다.

    일월상도 가운데 일상도(日象圖)는 태양을 뜻하는 그림으로, 둥근 원(圓)안에 다리가 셋 달린 봉(鳳) 또는 닭(鷄) 모양이 그려져 있어 삼족조(三足鳥)라 하며 일설에 의하면 까마귀라하여 삼족오(三足烏)로 불리어 지기도 하나 조자(鳥字)와 오자(烏字)의 한자가 같기 때문이라 삼족조로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삼족조는 청조(靑鳥) 또는 적조(赤鳥)라 하는데 「춘추(春秋)」에는 일중유삼족조(日中有三足鳥)라 했고,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일중유준조(日中有준鳥)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시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세 비석은 보존에 힘쓸 시기가 왔음을 밝혀둔다.

    봉황의 문양은 우리나라 전통적 문양으로 고대미술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회화에서는 고분벽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금동장식 공예에서도 폭 넓게 쓰여졌으니 대개의 삼족조는 봉황의 구성으로 닭의 모양과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발이 셋 달린 새의 상징성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불교(佛敎)의 영향권인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인도문화(印度文化)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 박운 기표( 朴雲 墓表)(남양주시 도곡리)

    인도의 “비슈누” 신화에 태양신을 찬미하는 가운데 “비슈누”는 일출(日出), 충천(沖天), 일몰(日沒)의 세 가지 현상을 세 걸음으로 이 세상을 헤아린다. 하고 한 다음, 천(天), 공(空), 지(地) 삼계(三界)를 일시에 건너 측량한다고 하였다. 그런 뜻으로 본다면 아마도 삼족조의 세 다리는 태양의 운행과 삼계와의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월상도(月象圖)는 달을 말하는 바, 삼천년을 산다는 두꺼비(蟾蜍), 또는 두꺼비와 토끼(玉兎)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회남자(淮南子)」는 “월중유담여(月中有蟾蜍)”라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後漢書)」의 천문지(天文志)는 항아(姮娥)가 서왕모(西王母)의 불로장생(不老長生) 약을 훔쳐 가지고 달로 도망하여 신의 노여움을 사 두꺼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끼의 그림은 우리나라 민화는 물론이려니와 고분벽화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변안열, 정미수, 박운의 세 묘표(墓表)에서는 두꺼비가 생략된 채 토끼가 절구통에 약초를 넣고 방아를 찧는 그림이 조식(彫飾)되어 있어 지금까지 전래하여 내려오는 전설을 듣는 듯하여 매우 흥미롭다.

    현장(玄裝)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빌어 이야기하자면 한 숲속에 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 사이좋게 살았는데 제석천(帝釋天)이라는 신이 늙은이로 변신하여 세 동물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영감은 몹시 배고픔을 호소하며 먹을 것을 구(求)하니 여우는 잉어를 잡아오고, 원숭이는 나무열매를 따 가지고 왔으나 유독 토끼만이 빈손인바 영감이 모두에게 꾸짖어 가로되 수행이 부족하여 화목치 못함을 질책하였다.

    토끼는 여우와 원숭이에게 미안함을 말하고 땔감을 모아 달라고 하더니 불을 지피고 하는 말이 “영감님, 저에게는 힘이 없어 잡수실 것을 구하여 오지 못하였으니 저의 이 몸을 잡수시옵소서.”하며 불 속으로 뛰어들어 타 죽었다.

    영감은 다시 제석천으로 되돌아와 토끼의 착하고 고운 마음씨를 높이 칭송하고 이런 사실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토끼를 달 한가운데에 넣어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이 전설을 들으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느끼는 바 있어 그저 씁쓸할 뿐이다.


    임병규 관장은..


    - 홍익대학교 회화학과 졸업(동양화 전공)

    - 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남양주시)

    - 현 남양주향토사료관장






    http://남양주타임즈 [200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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