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반 많은 선교사들은 여름이면 풍토병을 피해 이 땅을 떠났다 돌아오곤 했다.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과 다른 점은 이 땅을 버려두고 도망치듯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유진 벨과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지리산을 선택했다. 풍토병도 피하고 여전히 선교지와 연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름 수련회도 지리산 노고단에서 이뤄졌다. 기도와 찬양으로 영성을 강화했다. 이들은 지리산에서 한여름을 보내면서 힘을 얻었고, 한국 곳곳에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위의 글은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지를 지금까지 지켜왔던 인요한(존 A 린튼)이 지난 10월8일부터 11월5일까지 21회에 걸쳐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기술한 회고담 가운데 일부입니다.
인요한, 그와 한국과의 인연은 아주 특별합니다.  아니, 그의 가계(家系)와 지리산과의 관계는 운명적이라고 할만하지요. 그는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회고담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나는 전남 순천 촌놈이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순천에서 보냈다. 외증조부 때부터 내 아들 유진까지 5대째 108년을 한국에서 살고 있다. 유학기간 8년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다.
나는 보릿고개를 겪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현장에서 추방 상황까지 몰리기도 했다. 나는 또 분단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고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59년 전주 기독병원에서 출생한 인요한은 스스로 "나는 왕시루봉 세대다"라고 말합니다.
"왕복 16㎞의 길을 아마 몇 천번쯤 다닌 것 같다. 그만큼 내겐, 우리 가족에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에겐 친숙한 곳이다. 곳곳에 선교사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인요한은 아기일 때부터 아버지의 등에 업혀 왕시루봉을 오르내렸다네요. 그리고 왕시루봉 유적지를 끝까지 지키고자 현재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도 인요한 바로 그이입니다.

인요한이 스스로 '왕시루봉 세대'라고 말하는 데는 그의 가계가 지리산과 맺고 있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배경이 됩니다. 1920년대 중반 노고단에 외국인 선교사 수양촌을 건립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유진 벨 선교사가 그의 외증조부인 것입니다.

인요한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1920년 한국 선교의 꿈을 갖고 애틀랜타 중심지 땅 200에이커(25만평)를 에이커당 50센트씩 100달라에 넘기고 태평양을 건너왔답니다. 윌리엄 린튼은 한국에서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살럿 벨을 만나 1922년 결혼을 했어요.

유진 벨의 딸 살럿 벨은 1899년 목포에서 태어났지요. 윌리엄 린튼과 살럿 벨은 전주, 이리, 군산 등에서 선교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는 전주 기전여고와 신흥고 교장을 지내기도 했고,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출국 당했다가 광복을 맞아 한국에 다시 돌아와 57년 대전대를 세웠답니다.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한국명 印休)이 인요한의 아버지이지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난 휴 린튼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해군장교로 복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답니다.

그 뒤 대학을 마친 그는 부인 로이스 린튼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순천에 파송됐어요. 순천을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이들 부부는 1959년 여섯번째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가 존 A 린튼, 곧 인요한입니다.

인요한의 아버지 휴 린튼, 곧 인휴는 1956년 노고단에 오릅니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선교사 수양촌을 복원하기 위한 기도회도 갖습니다. 하지만 노고단에 등산로가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더이상 수양처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색을 거듭한 끝에 찾아낸 곳이 주능선과 떨어진 왕시루봉이었지요.

1962년 왕시루봉에 교회와 11채의 작은 목조 오두막들이 들어섰습니다. 이 일을 주관한 휴 린튼 선교사는 당시 국유재산을 관리하던 서울대 남부연습림과 산림보호를 위한 관리인을 둔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군요. 왕시루봉에 제2의 선교사 휴양촌을 건립한 그는 주변 일대에 전나무와 잣나무 등을 심으며 산림보호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답니다.

이 왕시루봉 수양촌이 건립될 때 어린 아기로 아버지의 등에 업혀 왕시루봉을 오른 이가 바로 그의 아들 인요한입니다. 그는 그 이후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매년 이곳에 올랐고, 1984년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한 이후에는 아버지 인휴를 대신해서 지금까지 왕시루봉 수양촌을 지켜왔습니다. 그에게 지리산 선교 유적지에 대한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