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천사(嚴川寺) 차향(茶香)(3)

by 최화수 posted Jul 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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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2년(1471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록의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김종직 군수의 눈에 먼저 비친 것은 군민들이 차(茶) 때문에 받는 고통이었어요.
함양 땅에는 차(茶) 한 톨 나지 않는데, 조정에서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를 공물(貢物)로 바치라고 했거던요.
그이는 당시의 사정을 '점필재집' 제10권에 다음과 같이 썼어요.

'차를 조정에 올려야 하는데 우리 군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해마다 백성(함양군민)들에게 차를 공물로 바치라 한다.
백성들은 전라도에 가서 차를 사와서 공물로 바치는데, 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살 수 있다.
내가 이 군에 부임한 초기에 그 폐단을 알았다.
그리하여 차 공물을 백성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군의 돈으로 차를 사서 공물로 바쳤다.'

함양군민들의 차 공물 부담을 군청에서 맡아 처리하게 했으니, 김종직이야말로 애민사상이 투철한 목민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김종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지요.
그이는 '삼국사기'에서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나무 종자를 구해다 지리산에 심었다고 하는 기록을 본 기억을 떠올린 거에요.
그래서 그이는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우리 군(郡)이 지리산 아래 있으니 어찌 신라시대에 심은 차나무 종자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이는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차나무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는 거에요.
그러다가 마침내 엄천사 북쪽 대나무밭에서 차나무 두어 그루를 찾아내게 됩니다.
김일손이 '속두류록'에 고색창연한 사찰이라고 언급한 엄천사, 신라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큰 사찰이었기에 그나마 그 차나무라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김종직의 관련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나는 매우 기뻐서 그 곳에 차밭을 만들도록 했다.
그 곳 주위는 모두 백성들의 땅이라서 군에서 다른 곳의 토지로 대신 보상해주고 모두 사들였다.
몇 년이 지나자 차나무가 제법 번성하여 차밭 안에 골고루 번졌다.
앞으로 4~5년 기다리면 조정에 올릴 정도의 수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직은 엄천사에 '함양다원(咸陽茶園)'이란 관영차밭을 조성하게 된 것을 기려 또 한편의 시를 지었어요. 그것이 지난 1998년에 엄천사터에 세운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차원 조성지' 기념비 뒷면에 새겨져 있답니다.

''영험한 차를 올려 우리 임금 오래오래 사시도록 하고 싶은데,
신라 때 심었다는 종자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겠네.
이제야 두류산 아래서 차나무를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구나.

대숲 밖의 황폐한 밭 몇 이랑을 개간했으니
새 부리 같은 보랏빛 찻잎 언제쯤 볼만해질까.
백성들의 마음속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일뿐
무이차처럼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네.'

점필재 김종직이 목민관으로 얼마나 애민정신이 깊었는가를 이 한편의 글로써도 엿볼 수 있는 것이지요.
엄천사 차향(茶香)에는 김종직 선생의 그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 사람들은 고려 때부터 차 공물의 폐단으로 엄청나게 시달려 왔어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고려말 혼란기와 조선초의 어수선한 시기에 지리산 주민들은 차나무를 베어버리거나 불을 지르기도 했다는 군요.
지리산 사람들의 그 고통은 고려의 해동공자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아주 절절하게 묘사돼 있지요.

'...(전략)
관청에서 어린 것, 노인 가리지 않고 마구 불러내어
험준한 산비탈 다니며 간신히 찻잎 따 모아
머나 먼 서울까지 등짐으로 져 달랐네.
이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이나니
수많은 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나니
일천가지 허물어서 한 모금 차 마련하나니
이 이치 알고 보면 참으로 어이없구나.
그대 다른 날 간원(諫院)에 들어가거든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해주게나
산과 들의 차나무 불살라 버려서 차 세금을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에 이로부터 시작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