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기념관'에 가면...(4)

by 최화수 posted Dec 09, 200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04년 8월18일 남명기념관이 개관됐습니다.
이현재 덕천서원원장과 김태호 경남도지사, 남명학연구원 관계자, 그리고  각계 인사 등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의식과 함께 개관이 됐어요.
마치 500년만에 남명 선생이 환생이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좋은 일을 하는 와중에 실수가 따랐던 거에요.
기념관 내부의 일부 안내 패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개관식 참관자 일부는 아주 황당해하거나 당혹감을 떨치지 못했답니다.

남명선생이 61세 때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에서 학문정진과 제자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시기를 '천도를 이루려 한 산천재시대'라고 한글로 설명해 놓고, 다시 영문으로 다음과 같이 써놓은 것입니다.
'The times of Sacheon Jae Trying to Transfer the Capital of the Country'

그러니까 남명은 지리산 산천재에서 수도 서울을 옮기기 위해 노력한 선비로 착각하도록 잘 못 써놓은 것이지요.
기념관 개관 당시 행정수도 이전을 싸고 천도(遷都) 수준이니, 아니니 하고 한창 떠들썩했었지요.
그렇더라도 '천도(天道)'를 '천도(遷都)'로 잘 못 해석한 것은 큰 잘못이네요.

패널에 잘 못 씌어진 글자들은 또 있었답니다.
산천재(山天齋)를 山天齊(산천제)로, 貞敬부인을 貞卿부인 식 등으로 오기한 것들이 더러 있었지요.
개관 날짜에 맞추고자 서둘러 패널 제작을 하다보니 이런 실수가 빚어진 듯합니다.
물론 잘못 된 안내 패널 글자들은 개관 직후 모두 바로잡았습니다.

남명기념관 개관 때 행정수도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하다보니 '천도(天道)'를 '천도(遷都)'로 착각한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또 하나, 남명기념관 건립공사가 한창일 때 SBS의 TV드라마 '여인천하'가 큰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었지요.
그 '여인천하'의 시대가 바로 남명이 살던 시대였어요.

'여인천하'의 주인공 문정왕후, 그녀를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이가 남명이지요.
문정왕후와 남명은 동갑내기였어요.
남명은 문정왕후를 가장 강렬하게 비판했어요. 저 유명한 '을묘사직소', 곧 '단성소(丹城疏)'가 바로 그것이에요.
당시 조정에서는 남명을 회유하기 위하여 관직을 내렸지만, 남명은 그것을 거절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문을 쓴 것입니다.

명종 10년(1555년) 을묘년, 왕으로부터 네번째의 부름을 받고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남명은 '단성현감 사면을 청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남명은 단지 벼슬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어지러운 실정을 통박하면서 문정왕후를 '조정의 일개 과부'로, 임금 명종을 '선왕의 한 어린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했어요.
그 상소문 일부를 여기서 다시 한번 볼까요.

[(전략)...전하의 나랏일이 벌써 잘 못 되어서 나라 근본이 이미 망해 가고, 천의(天意)가 이미 버려졌으며, 인심도 떠나서 비유하면 백 년 된 나무가 속은 벌레가 다 파먹었고 진액도 말랐는데, 폭풍우가 언제 닥쳐올 지를 알지 못함과 같이 된 지가 오랩니다.
.......
자전(慈殿)께서는 이 일들에 생각은 깊으시겠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못 하시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先王)의 어리고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입니다.
천백 가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 된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수습해 내겠습니까...(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