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기념관'에 가면...(2)

by 최화수 posted Nov 2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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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평 부지에 54억원을 들여 세운 남명기념관의 위용이 대단하다면 대단한 셈입니다.
아주 날아갈 듯한 기와집에 수십 길 은행나무들조차 쓸쓸하게 느껴질 만큼 뜨락이 엄청나게 넓습니다.
은행나무 노란 잎새 위로 천왕봉이 늠름하게 자리합니다.
뜨락 한편에 서있는 남명 석상(石像)이 웃음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화강암으로 다듬은 남명 입상은 남명기념관보다 먼저 세워졌었지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흔히 보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지나치게 큰 것으로 생각됐었어요.
자신의 조각을 그처럼 크게 세운 것을 남명 선생이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명기념관 건물과 함께 보니 그 조각이 결코 큰 것이 아니로군요.

기념관의 규모가 그만큼 당당한 위용을 자랑한다고 할까요?
사적 제305호 '남명 조식 유적지'에서 종래의 대표적인 건물은 덕천서원과 산천재였습니다. 산천재는 남명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이었고, 덕천서원은 후학들이 남명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지요.
이 산천재와 남명서원은 남명 관련 행사가 없을 때는 대체로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고는 했어요.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제3권 302쪽에는 아주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전면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산천재 문짝이 폐가의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훼손돼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과 함께 실린 글은 이렇게 씌어 있네요.
[...방문마다 창호지가 찢어져 있고, 어떤 문짝은 아예 돌쩌귀며 빗살까지 통째로 찢겨나가고 없다. 방바닥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마치 폐가를 연상케 한다...]

이제는 남명유적지를 대표하는 건물은 남명기념관입니다.
기념관에는 첨단시설들이 있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믿음직한 조성섭 관장(館長)과 남명학 등에 해박한 문화유산해설사도 있습니다.
문화유산해설사는 남녀 두 명인데, 남명선생 15대손인 조종명님은 바로 이웃한 삼장면 대포리(내원사 입구)가 고향이라고 합니다.
지성미가 넘치는 여성해설사는 다정다감하고 친절합니다.

남명기념관 앞쪽은 산천재가 지리하고, 뒤쪽은 선생의 가묘(家廟)인 '여재실(如在室)과 종가, 신도비 등이 있고, 뒷산에는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청소년 등이 합숙하며 남명 정신을 익힐 수 있는 수련원 시설 등을 앞으로 추가로 세울 것이라고 하네요.
어쨌든 남명기념관이 들어서면서 남명 유적지가 새롭게 단장되거나 관리가 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사실 산천재의 문짝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던 남명유적지의 종래 현실과 견주어본다면 거대한 규모의 남명기념관을 새로 건립한 것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산천재의 방문이 찢겨나갔을 그 무렵에는 남명 묘소 앞에는 총탄자국이 어지럽게 나있는 비석(신도비)이 뒹굴고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묘소로 가는 오솔길이 차도로 바뀌고 주차장이 들어서 있기까지 하답니다.

남명기념관은 선생의 탄신 500돌을 맞았던 지난 2001년 그 초석이 마련됐어요.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과 1501년 동갑나기지요. 두 사람은 당대의 사표로서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리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종사(宗師)로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습니다.
남명 탄신 50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기념관 탄생의 길을 열게 되었으니, 남명은 태어난 지 500년만에 자신의 유적을 제대로 관리할 지침을 내리기라도 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