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명당 금환락지(金環落地)(4)

by 최화수 posted Oct 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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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명당의 넉넉한 땅 구만들(九萬坪).
노고단을 꼭지로 20리 가량 흘러내린 덕은내가 사시사철 이 들녘을 마르지 않게 하고 있지요.
구례의 다른 들판이 가뭄으로 씨앗을 건지지 못하는 때에도 구만들은 끝까지 열매를 건져주는 곳이라 하여 '종자평(種子坪)'이라고도 불립니다.

문수봉(文洙峰)란 노고단 물이 흘러내린다고 하여 문수천으로 일컫기도 하지요.
이 계곡에 '他不川(타불천)'이란 글자도 새겼다네요.
운조루 5대 주인 유제양은 "이 내가 아닌 다른 내는 내라 할 수 없다"고 하여 바위에 '타불천'을 새긴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만들이라 하여 역사의 격랑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이곳 동쪽 들목의 석주관은 왜구와의 처절한 사투로 시산혈해를 이루기도 했던 곳입니다.
덕은내, 곧 문수천만 해도 1948년 여순병란 패잔병들이 이현상에 이끌려 잠입한 최초의 지리산 땅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 거대한 양반가옥 운조루는 200여년을 용케 버티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이 바로 목독(나무 쌀독)에 있다고 하는 군요.
99간의 대저택 운조루 사랑채와 안채 중간 지점에 곳간채가 있고, 그 곳간채에는 지금도 쌀뒤주 하나가 옛모습 그대로 놓여있어요.

지름 80㎝ 정도의 큰 통나무로 속을 비워내고 곡식을 담는, 둥그런 원목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 뒤주 하단부에 가로 5㎝, 세로 10㎝ 정도의 직사각형 구멍이 있는데,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어요.
다른 사람 누구라도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와서 쌀을 마음대로 퍼갈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고 하고, 가난한 동네 사람과 지리산 과객들에게 쌀을 주기도 했다는 거에요.
주인과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쌀을 받아갈 수 있도록,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배려한 쌀뒤주인 것입니다.

운조루에서 지은 논농사는 2만평,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했다고 하는군요.
쌀 뒤주에 들어가는 쌀은 36가마 정도로 1년 소출의 약 20%를 차지했어요.
운조루 3대 주인 유억은 쌀뒤주가 비워지지 않자 며느리에게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쌀이 남은 것은 그만큼 덕을 베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냐. 당장 이웃에 나눠줘라. 그믐날엔 항상 뒤주에 쌀이 없도록 해라!"

운조루의 굴뚝 또한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게 합니다.
이 집 굴뚝은 높이가 1미터도 채 안 되는, 아주 낮게 설치한 것이 특징이지요.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군요.
밥을 굶고 있는 이들이 부잣집에서 펑펑 올라가는 굴뚝 연기를 보고 더욱 허기를 느낄 것을 걱정한 때문에 일부러 굴뚝을 낮게 한 것이랍니다.

운조루의 나지막한 굴뚝 등에서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보게 됩니다.
'타인능해'의 쌀뒤주와 낮은 굴뚝, 남을 배려하는 이런 정신이 동학과 여순병란, 6.25의 격랑 한가운데 자리하면서도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이유라고도 말해집니다.
은혜를 입은 주민들이 그 보은으로 난리통에도 이 집을 지켜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