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산장과 '무장비 등산'(2)

by 최화수 posted Jul 2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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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 9일 새 노고단산장이 문을 열기 닷새 전인 1월4일, 16년 동안 기존 노고산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던 함태식님은 피아골산장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이는 눈이 수북이 쌓여 무릎까지 빠지는 산길을 힘들게 걸어 질매재를 거쳐 피아골 삼거리의 썰렁한 대피소로 내려간 것이지요.
여섯 명의 군인과 조카, 그리고 청년 한 명이 짐을 옮겨 주었어요.

정든 노고단을 떠나야 했던 '노고단 호랑이' 함태식님의 당시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이는 그 때의 참담했던 심사를 '귀양을 떠나는 선비의 심정'에 비교했답니다. 그이의 저서 '단 한번이라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라면'이란 책에 당시의 비애감을 다음과 같이 썼어요.

'허허로움 때문이었을까. 질매재에 이르는 길은 유난히 멀고 험하게 느껴졌다. 아마 귀양을 떠나는 선비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이다.
나는 질매재에 이르러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구부숨한 봉우리 위로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 쌓인 흰덤봉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 줄기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16년 동안 노고단을 지켜온 그이가 어째서 피아골로 밀려나야 했을까요?
그것은 물론 노고단에 현대식 양옥 건물인 새 산장이 건립되고, 그 산장을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직영하게 된데 따른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잠깐 기억해보아야 할 것은 함태식님이 구례중학교 학생들에게 노고단에 오를 때 모래 한 줌씩 날라다 줄 것을 부탁했던 일입니다.
그 삽화와 함께 '관리공단 직영 산장'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앞서게 되지요.

관리공단에서 '산장 직영'이란 새로운 발상의 결정적인 뒷받침을 하게 된 것은 해발 1090미터의 성삼재 종단 군사작전도로의 2차선 관광산업도로 확포장이었어요.
노고단 코 아래에 찻길이 열리고 관광객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자 관리공단이 욕심을 냈던 것이지요.
새 노고단산장은 기존의 대피소 개념에서 탈피하여 배낭도 없이 오른 관광객들까지 수용하여 자신들의 수익사업에 활용하는 방편으로 삼은 것이지요.

실제로 새 노고단산장은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오른 유산객이 샌들을 신고 부채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오더라도 야영과 취사의 산상 낭만을 만끽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게 됩니다.
이른바 '무장비 등산시대'를 열게 한 것이지요.
관리공단은 이 때부터 노고단 뿐만아니라 세석고원과 장터목의 다른 산장들도 현대식 대형 건물로 고쳐지어 직영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새 노고단산장을 건립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성삼재 종단 도로는 어째서 생겨난 것일까요?
지리산 주능선을 종단하는 2개의 도로가 성삼재 종단도로, 벽소령 종단도로입니다.
그런데 이 두 도로는 참으로 엉뚱한 일이 계기가 되어 생겨난 것이에요.
  
벽소령 종단도로는 화개동천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을 지나 지리산 척추인 벽소령을 넘어 마천의 실덕마을까지 37㎞에 이릅니다.
이 벽소령 종단도로와 함께 천은사에서 성삼재를 넘어 달궁에 이르는 성삼재 종단도로도 같은 군사작전용으로 뚫었어요.
지리산 주능선을 절개하는 이 작전도로가 착공되는 것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에서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입니다.

이 때 웬 군사작전 도로가 새삼스럽게 착공된 것일까요?
그것은 우습게도(?)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답니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다네요.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지요.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아주 기가 막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