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선계곡 은둔자들의 발자취(1)

by 최화수 posted Mar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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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산악인들이 '칠선계곡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이 골짜기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64년이라고 했었지요.
그들은 학술조사대란 이름으로 나섰지만, 사실은 등산로 개척에 더 목적이 있었던 듯했습니다.
징담과 폭포 등에 일일이 자신들의 산악회 이름 등을 따서 명명을 한 것이 그 보기라고 하겠네요.

그런데 이 학술조사대는 원시림의 계곡 중턱에서 목기제작소를 발견했고, 수령 200~300년의 거대한 나무들을 베내 함지박 등을 만들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놀랐었지요.
또 이 조사대 선발대로 본대에 조금 앞서 칠선계곡을 찾은 성산님은 기업형 도벌이 만들어낸 '목마로(木馬路)'와 '도벌댐'의 실상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답니다.

'최후의 원시림지대' 칠선계곡은 전란 후 등산객의 발길이 닿기 전에 도벌꾼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무차별적 도벌 실상을 지켜보면서 부산의 산악인들은 '학술조사대'란 명칭을 달고 나선 것 자체가 민망하게 생각됐을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도벌꾼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도벌꾼 그들보다 훨씬 이전에 칠선계곡에 산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칠선계곡은 험악한 지형과 원시림 지대라는 특별한 자연환경으로 하여 일제시대부터 은신자들의 대피소 역할을 해왔답니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이곳 칠선계곡으로 숨어들어 군데군데 산막을 치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수백명에 이르렀다니까 칠선계곡이 얼마나 번잡(?)했을는지 그려지기도 하네요.

사실 그들에게는 훤히 뚫린 산길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지요. 아니, 산길이 훤히 열려 있었다면 마음놓고 숨지도 못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칠선계곡은 지리산 최대의 은신처로 오랜 기간 그들만의 세상으로 존재했던 것이지요.
은신자들의 세상, 그러나 칠선계곡은 사람들이 은신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답니다.

일제시대에 학병, 징병을 피해 칠선계곡으로 숨어든 인물 가운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준수)가 있었어요.
1921년 경남 함양 태생인 그는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을 갔던 엘리뜨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학중 징집을 피해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들어와 은둔의 길을 걷습니다. 아니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유격대 총책으로 '최후의 빨치산'이 되는 비극적인 삶의 길을 걷게 됩니다.

남도부는 타고난 무쇠같은 체력과 유격총책으로서의 정신무장으로 칠선계곡에서 지리산 주봉 천왕봉을 무수히 오르내렸을 것이에요.
그는 칠선계곡 원시림지대에서 단지 은신의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었답니다.
그가 칠선계곡에서 닦고 키워왔던 '엄청난 비밀'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게 됐어요. 그것은 최초의 '천왕봉 무장봉기'로 기나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었답니다.

그의 천왕봉 무장봉기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희화적인 전투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이 있어요.
남도부의 빨치산부대, 일명 야산대는 1948년 5.10 단선반대투쟁을 앞두고 지리산 상상봉인 천왕봉에 아지트를 만들어 운영을 하고 있었어요.
구례지방의 박종하 야산대가 피아골에 본거지를 둔 것과 달리 이들은 천왕봉 꼭대기를 아지트로 삼은 것도 대비가 되는 점이에요.

남도부 부대원은 100명 가량이었다는 설과 500~600명의 대병력이었다는 상반된 주장이 있습니다.
이들은 5월10일 천왕봉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단선을 저지하기 위한 경찰관서의 습격과 방화, 경찰관 우익인사의 암살, 통신망과 철도 파괴 등 2.7 투쟁의 행태를 되풀이하고자 했었답니다.